"공부(貢賦)"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9일 (토) 23:1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공부 |
한글표제 | 공부 |
한자표제 | 貢賦 |
상위어 | 공납(貢納) |
분야 | 경제/재정/전세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장우 |
시행시기 | 조선건국 직후 |
시행기관 |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부(貢賦)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10월 12일 |
국가가 수취하는 전세·공물·진상·잡세·각종 부역 등과 같은 모든 조세의 총칭 또는 공물과 부세.
개설
공부는 흔히 국가에서 징수하는 모든 종류의 세금을 가리켰다. 조선건국 직후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토지의 생산을 헤아려 공부를 정하였는데(『태조실록』 1년 10월 12일), 전적(田籍)에 근거하여 토지에서 생산된 것을 매년 일정하게 바치는 것을 상공(常貢)이라 하였다. 한편 귤이나 유자처럼 철에 따라 나는 물품으로, 상공이 될 수 없는 것은 별공(別貢)이라 하였다.
국가는 공부의 징수를 위해 일종의 세입(歲入) 계획표인 공안(貢案)을 작성하고, 주·현 단위로 토산물과 농경지의 면적을 조사하여 공부의 종류와 양을 정하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공부를 토지 면적이 아닌 민호(民戶)별로 부과하였기 때문에 경제력이 빈약한 농민층에게 불리하였다. 게다가 방납(防納)은 농민들을 더욱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
내용
원래 아래에서 바치는[供上] 것을 공(貢), 위에서 거두어 가지는 것을 부(賦)라고 하였다. 이처럼 공과 부가 각각 사용된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국가 재정을 위한 재원으로 징수하는 모든 종류의 수취를 표현할 때 공부라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에서 부(賦)를 국가를 경영하는데 소요되는 것으로, 인민들로부터 수취하는 전곡(錢穀)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어 주군(州郡)·호적[版籍]은 부의 소출, 경리(經理)는 부의 통제, 농상(農桑)은 부의 근본, 부세(賦稅)는 부의 헌납, 조운(漕運)은 부의 수송, 염(鹽)·철(鐵)·산장(山場)·수량(水梁)·공장세(工匠稅)·상세(商稅)·선세(船稅)는 보조, 상공(上供)·국용(國用)·녹봉(祿俸)·군자(軍資)·의창(義倉)·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은 부의 쓰이는 바, 견면(蠲免)은 부의 완화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부가 전세 또는 전조(田租)와 더불어 사용될 때에는 공물을 의미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미곡류(米穀類)와 공물을 구분하였고, 『경상도지리지』에서는 미곡류인 전세와 포면류(布綿類)·유밀(油蜜) 등과 같은 전세 공물, 그리고 토산 공물을 각각 구분하였다.
이와 같이 공부는 한 가지 용례로만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건국 직후 공부상정도감에서는 토지의 생산을 헤아려 공부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전적에 근거하여 토지에서 생산된 것을 매년 일정하게 바치는 것을 상공(常貢)이라 하였고, 귤이나 유자처럼 철따라 나는 물품으로 상공이 될 수 없는 것은 별공(別貢)이라 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공부의 징수를 위해 일종의 세입(歲入) 계획표인 공안(貢案)을 작성하였다. 각 주·현 단위로 지방의 토산물과 농경지의 면적을 기준 삼아 공부의 종류와 양을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공부를 각 민호별로 부과하였기 때문에 경제력이 빈약한 농민층에게 불리하였다. 게다가 공납의 폐단인 방납 때문에 납부자들의 부담이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변천
공부의 수취를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거두어 사용하는 사람 본위로 하다 보니 많은 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선조대 이후 상공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계기로 대동미(大同米)·대동포(大同布) 등으로 전환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田川孝三, 「李朝貢物考」, 『朝鮮學報』 9, 195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