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水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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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물이 많이 서식하거나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지점에서 어선을 타고 어업을 하는 곳으로 조선후기에는 어장으로 불렸음.

개설

수량(水梁)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기 힘들다. 『설문(說文)』에는 수량을 다리로 해석하였고, 한글학회에서 지은 『큰 사전』에는 수량을 ‘물이 흐르다가 좁아진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고려 때에는 산장 수량을 모두 호강(豪强)이 점탈(占奪)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수량은 어량과 비슷하게 강이나 바다에서 어업을 통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무엇이었던 것 같다. 또 『태종실록』에는 ‘각처의 어량 전주 수량 선주 운운’하는 말이 나온다. 이를 보면 어량은 후대의 어전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수량은 어선을 타고 낚시나 그물과 같은 것으로 어업을 하는, 일종의 어장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고려말까지는 권세가들이 수량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조선건국 이후 개인의 수량 독점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관할하는 정책을 폈다. 즉, 1392년(태조 1) 7월, 사재감을 두어 수량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1397년(태조 6) 10월에는 각 도에 감찰을 파견하여 수량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세를 정하고 장부에 기록하여 비치하였다. 그 다음해 4월에는 삼사에 명하여 수량 등에서 거둔 수세액의 다소를 조사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어염세는 군사비의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어업 생산물은 천신(薦新)과 진상(進上)으로 바치는 것 외에는 모두 곡물로 바꾸어 군자곡으로 활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당시 수량에서 정확히 어떤 세율을 적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대체로 어획고의 1/10의 정률세를 적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세의 세율과 마찬가지로 표면적 규정에 불과하였으며, 어세의 징수는 사실상 가혹하였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봉건 지배층의 개별적 수취는 대단히 가혹한 것이었으므로 어민의 부담이 막중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변천

조선은 건국과 함께 수량의 공유제를 표방하고 그 수세와 관리를 사재감에서 관장 하도록 하였다. 1413년(태종 6)에 이미, ‘어량과 수량은 사재감에 전속시켜 수세하여 국용으로 사용한다.’고 『경제육전』에 실려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앙과 지방의 권세가가 어장 등을 사점하고 있고, 또 납세도 거부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를 보면 권세가와 그 노비들이 권력을 빙자하여 수량과 같은 어업 생산지를 독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직전제와 내수사 장리가 혁파된 중종대 이후 궁방의 어전 절수(折受)가 늘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참고문헌

  • 박구병, 『韓國漁業史』, 정음사, 1975.
  • 최승희, 『한국수산사』, 수산청, 1966.
  • 이영학, 「조선후기 어업에 대한 연구」, 『역사와 현실』 35 , 한국역사연구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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