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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이은(李垠)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엄씨를 위해 건립한 제사궁.

개설

1911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주를 모시기 위해 1913년에 덕수궁 내 영복당(永福堂)이 있던 터에 덕안궁을 지었다. 1929년에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모여 있는 후궁들의 제사궁 터로 신주를 옮기고, 그 터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이왕직(李王職)에서 일반인에게 판매하였다. 궁정동의 제사궁은 덕안궁의 이설로 칠궁(七宮)을 이루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순헌황귀비의 제향을 담당하는 제사궁인 덕안궁은 덕수궁 안에 있다가, 1929년 오늘날의 위치인 서울특별시종로구 궁정동으로 옮겨졌다.

변천 및 현황

상궁이던 엄씨는 1897년(광무 1) 영친왕을 낳고 귀인(貴人)에 책봉되었으며, 1900년(광무 4) 순빈(淳嬪)에, 1901년(광무 5) 순비(淳妃)에 책봉되어 경선(慶善)이라는 궁호를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순비의 호칭과 재산을 관리하는 궁가를 경선궁(慶善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순비는 1902년에 다시 황귀비(皇貴妃)에 봉해졌으나 정식 황후는 되지 못했다. 이후 1908년(융희 2)에 덕수궁과 경선궁의 재산이 모두 국유화되면서, 경선궁은 순헌황귀비의 거처와 궁호만을 가리키게 되었다(『순종실록』 1년 6월 25일).

1911년 7월 순헌황귀비가 죽자 빈궁(殯宮)흥덕전(興德殿)으로, 혼궁(魂宮)은 영복당으로, 처음 명정을 쓰는 곳은 석어당(昔御堂)으로 정하였다. 순헌황귀비의 시신을 영휘원(永徽園)에 예장한 뒤 신주를 영복당에 모셨다가, 삼년상이 끝난 후에 별묘인 덕안궁을 지어 제향하기 시작했다. 덕안궁은 본래 덕수궁의 영역 안에 있었으나 1929년 5월 29일 황귀비의 신주를 서울특별시종로구 궁정동으로 옮겨 모신 뒤, 그 터는 이왕직에서 일반인에게 팔았다.

형태

현재 칠궁 내에 있는 덕안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올렸다. 내부에 당가(唐家)를 설치하여 신주를 모시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내부의 벽은 육색(肉色)으로 단청하고, 외부는 화방벽(火防壁)을 둘렀다. 측면은 중방 아래까지만 벽돌을 쌓고 상부는 육색으로 단청했으며, 뒷면은 상방까지 벽돌을 쌓았다. 기둥은 네모난 것을 사용했는데, 내부와 외부 모두 기둥뿌리[主根]에 도배를 했으며, 전면 분합(分閤)은 옥색 칠을 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1929년 5월 30일; 1929년 6월 23일.
  • 京城府 編, 『경성부사(京城府史)』 권1, 193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