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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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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다대진 |
한글표제 | 다대진 |
한자표제 | 多大鎭 |
상위어 | 관방(關防) |
동의어 | 다대포(多大浦) |
관련어 | 부산포(釜山浦)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규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다대진(多大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7년 2월 27일, 『태종실록』 7년 7월 27일, 『태종실록』 17년 8월 20일, 『성종실록』 14년 5월 8일, 『성종실록』 21년 11월 29일 |
낙동강 하구에 위치했던 조선시대의 진영.
개설
다대진(多大鎭)은 북방의 만포진(滿浦鎭)과 함께 남방의 군사상 요충지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다만 진영의 개념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조선후기까지도 다대포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고종대까지도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라는 관직명이 남아 있었던 사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다대진은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있는 다대반도와 두송반도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다섯 개의 작은 만으로 다시 구분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대포가 동래현(東萊縣)에 속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동평현(東平縣)의 남쪽 30리(약 12㎞)에 위치하고 있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수군만호를 배치해서 적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내용을 통해 주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시대 이전에는 다대진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말 이후 왜구가 성행하면서 다대진의 군사적 중요도가 증가했고 국방체제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되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항상 왜구 방어 문제를 논의하면서 다대포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다만 중종대에 다대포에 새로 진영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어 다대진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로 추정된다(『중종실록』 17년 2월 27일). 그러나 이미 조선초기부터 왜구 문제 등으로 인해 방어기지의 역할이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서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이 설치된 이후 이 지역에서 수행하던 역할이나 임무 등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는 한적한 어항으로 있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 조선소와 제재소 등의 대형 공장이 이 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대진 일대는 공업지대로 변하게 되었다. 아울러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고, 다대포해수욕장 등이 개장하면서 상업적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주변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들이 주로 남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다대포의 군사적 기능이 강조되었던 것은 태종대였다. 당시 경상도병마절제사강사덕(姜思德)은 이전에는 다대포가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라 하여, 좌도도만호에게 겸하여 거느리게 하였지만 지금은 다대포천호를 별도로 두고 부산포(富山浦)의 병선 세 척을 나누어서 배치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병선의 수가 적기 때문에 나누어서 정박시키지 못하고, 도만호가 있는 부산포에만 정박시키고 있어 방어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다대포천호를 혁파하고 도만호로 하여금 순회하면서 방어하도록 하자는 건의 내용이었다. 태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태종실록』 7년 7월 27일). 이를 통해 다대진의 군사적 역할이 이전보다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10년 후에는 다대포의 중요성이 더욱 높게 평가돼 수군도절제사의 건의에 따라 만호를 파견하고 정식으로 병선을 배치했다(『태종실록』 17년 8월 20일).
성종대에는 경상도관찰사김자정(金自貞)이 좌도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모두 울산(蔚山)에 있어서 백성의 처지에서 폐단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자정은 울산을 도호부(都護府)로 올려서 부사와 판관을 두어 병마절도사에게 부사를 겸임하게 하고, 한 개의 영(營)을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면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성종은 병조 및 경상도관찰사·절도사를 지낸 사람들을 불러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윤흠(尹欽)·이철견(李鐵堅)·구문신(具文信)·하숙부(河叔溥)·구겸(具謙)·이서장(李恕長)은 수영(水營) 한 개를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한다면 다대포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성종실록』 14년 5월 8일). 수영을 다대포로 옮기는 방안에 대한 언급이 이후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방안은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영을 다대포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온 것에서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중요도가 다시 한번 높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1490년(성종 21)에는 높이 13자(약 4m), 둘레 1,806자(약 547m)의 다대포성을 축조했다(『성종실록』 21년 11월 29일).
참고문헌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동래부지(東萊府誌)』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영남읍지(嶺南邑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립지리원, 『한국지명요람』, 국토지리정보원, 1982.
-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지』, 부산시, 197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