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포진(滿浦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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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강계도호부에 속한 첨사진.

개설

만포는 평안도 16곳의 진 가운데 하나였다. 만포는 압록강 연안에 설치한 작은 변방 방비시설인 구자(口子)로 세조대 이전까지 무관인 만호가 파견되었다. 만포구자는 문종 즉위년에 내지 방어에 전념하기 위해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의 3군이, 1459년(세조 5) 자성까지 4군이 모두 폐지되자, 만포의 교통 문호로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1460년에 진(鎭)으로 승격되어 종3품의 첨사가 파견되었다.

위치 및 용도

만포는 평안도 강계에서 자성으로 통하는 도로 중에 가장 북방에 위치했던 북방 방어의 최선단이었다. 만포와 강계와의 거리는 90여 리였다. 만포 이남은 각 진보(鎭堡)가 강을 따라 벌여 설치되어 있었다. 1433년(세종 15) 파저강 야인을 정벌했을 때 만포는 여진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두 군데의 길목 가운데 하나였다. 1437년 다시 여진 정벌이 단행되었을 때도 정벌군은 만포구자의 앞 여울을 지나 여진 부락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만포는 국방상 요충지였다. 게다가 만포는 여진족을 관할하는 군영인 건주위(建州衛)와 바로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만포의 강 북쪽에 있는 황성평(皇城平)에는 건주위 야인이 옮겨와 둔을 치고 살았다. 여진은 반드시 만포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 또한 여진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몸을 의탁하는 곳이기도 했다. 건주위에 의해 피랍된 중국인들은 만포로 들어왔다가 요동으로 송환되기도 했다. 이처럼 만포는 서북의 문호로서 여진들의 조빙로(朝聘路)이자 조선전기 여진정책이 구현되는 중심지였다.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된 이후 만포진은 특히 건주삼위 여진들이 와서 조선에 귀순을 요청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기근으로 굶주린 여진들이 말을 가져와 곡식으로 교환해 가기를 청하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만포진은 그 지리적 특성상 조선에서 여진 지역으로 넘어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만포구자는 세종대 이래 강계와 더불어 여진들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거나 변고를 알리기 위해 오는 곳이었다. 만포구자는 문종 즉위년에 내지 방어에 전념하기 위해 폐지되었다. 당시 방어상의 어려움 외에 서몽골 오이라트 세력이 여진족을 압박하면서 그에 몰린 건주위 추장 이만주와 동창·범찰 등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올 태세였다. 만포구자가 철폐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방어하기 어려운 곳을 포기하는 대신 내지의 방어를 더욱 굳건히 하자는 뜻에서 만포구자를 포기하고 대신 강계의 방어에 집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포구자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종래의 만포가 담당했던 국방상 요충지이며 여진과 접경지로서의 역할이 감소되지는 않았다. 만포는 여전히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국방상으로나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특히 4군이 폐지된 이후 북방 방어의 요충지이자 야인과의 교통문호로서 만포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지리상으로 만포가 강계에서 자성으로 통하는 도로 중에 가장 북방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이에 결국 만포는 1460년(세조 6)에 종3품의 첨사가 파견되는 진이 되었다. 특히 만포가 구자에서 진으로 승격된 이후, 보다 활발한 대여진 교린 활동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첨사가 임명되었는데, 첨사직에는 세조대부터 중종대 초반까지는 대개 무신(武臣)이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518년(중종 13)부터 문신으로 임명되었다. 무신이건 문신이건 만포첨사로 임명되는 인물은 까다로운 자격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평안도의 요해지이자 여진들이 왕래하는 지역으로서의 만포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때문에 만포첨사는 문무 양쪽에 모두 능하고 적에 대응하여 일을 잘 처리하는 자가 임명되었다. 만포첨사는 종3품이 임명되는 것이었지만 대개 당상관을 임명해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여진들이 잇달아 만포진으로 들어왔을 때 첨사는 그들을 접대해야 했는데, 이들의 끝없는 요구에 첨사는 ‘당상관’으로서의 적절한 판단 능력과 균형 감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야인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도 당상관의 차임이 필요했다. 만포진를 왕래하는 여진들은 첨사의 관직 등급을 물어보고 그 지위가 높으면 공경하고 무서워하고 낮으면 가볍게 보고 업신여겼다. 그래서 만포첨사는 문무에 능한 당상관 중에서도 북방의 군무를 감당할 수 있는 비교적 건장한 젊은 축들이 임명되었다. 중종대 초반까지는 만포첨사에 문무에 능하지만 무재를 우선해 임용했지만, 점차 장차 시종이나 대간이 될 만한 자들을 그에 임명했다. 그 이유는 후에 다시 대간이나 시종이 되었을 때 변방 일과 오랑캐의 정상에 관해 실지로 견문한 바를 아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중종대 중반 이후에는 반드시 문사(文辭)와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을 만포첨사에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형태

만포구자는 여진과 접경한 요충지로서 국경 방어상의 중요성 때문에 조명간(趙明干, 현 평안북도 자성군 장토면 장성동)구자와 더불어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목책은 간단한 말뚝을 박아 만든 방어 울타리로, 만포구자의 목책은 고산리 구자에 둔치고 수비하는 군인들이 방어했다. 1434년(세종 16)에 만포구자의 목책을 석성(石城)으로 교체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1442년부터 만포구자에 길게 둘러친 행성(行城)을 쌓았다. 당시 축성에 동원된 인원은 평안도 장정 9천 명이었다. 이들의 공역으로 1만 5,675척(약 4,750m), 석보 둘레 6,644척(약 2,013m)의 규모로 만포구자 행성이 축조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강계부 만포구자의 행성은 총 14리(약 5,498m)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만포는 매우 외진 변방이었다. 때문에 중죄인들을 이곳으로 유배 보내기도 하였다. 1472년(성종 3)에 갑사 유자공(兪自恭)은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석가모니처럼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했고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었다는 등 유언비어를 날조한 죄목으로 즉시 참형에 처하라는 참형부대시(斬刑不待時)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사형이 감해져서 곤장 1백 대를 맞고, 가족 모두를 만포진에 보내어 천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중종대 건주삼위의 조선에 대한 압박이 이어지면서 결국 1528년(중종 23) 만포첨사심사손(沈思遜)이 여진들에게 살해당했다. 심사손은 1525년 직제학(直提學)에서 당상으로 승진하여 만포첨사에 임명되었으나 1528년 1월 여진들에게 살해되었다. 심사손은 1월 23일 오전 9시~오전 11시에 해당하는 사시(巳時)에 차가대연대(車加大烟臺)의 건너편 금둔동(金屯洞) 등처에서 땔나무를 벌채하다가, 말을 탄 여진들 1백여 명의 공격을 받았다. 야인들은 심사손을 에워싸고서 협박하여 옷을 벗게 했고, 심사손은 옷가지를 벗을 때마다 구원할 사람들이 이르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야인들에 의해 모두 벗기워질 때까지 끝내 구원할 사람들이 오지 않아 결국 환도(環刀)를 맞고 즉사했다. 심사손은 현직 좌의정인 심정(沈貞)의 아들이었다(『중종실록』 23년 3월 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순남, 「조선전기 滿浦鎭과 滿浦僉使」, 『사학연구』9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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