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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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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기은 |
한글표제 | 기은 |
한자표제 | 祈恩 |
상위어 | 왕실의례(王室儀禮) |
관련어 | 기은도량[祈恩道場], 기은별감(祈恩別監), 기은사(祈恩使), 기은색(祈恩色),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 양재(禳災), 성수청(星宿廳) |
분야 | 문화/종교/민간신앙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정승모 |
시행시기 | 봄, 가을 |
시행기관 | 예조 |
시행장소 | 산천(山川), 창덕궁 선원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기은(祈恩)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1년 5월 23일, 『태종실록』 11년 7월 15일, 『세종실록』 16년 3월 1일, 『중종실록』 11년 2월 23일, 『중종실록』 22년 4월 18일 |
고려와 조선시대에 무당과 광대를 불러 왕가의 무궁한 복을 빌던 행사.
개설
기은(祈恩)은 왕가의 복을 빌기 위해 영험하다는 곳에서 의장(儀仗)을 엄하게 하고 악기를 갖추어 국무당(國巫堂)이나 환자(宦者)·사약(司鑰)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던, 고려 이래의 관행이었다. 고려는 이것을 기은도감에서 주관하였다. 또한 별례기은도감을 두었는데, 이것은 국가에 환난이 없도록 기도하는 일을 맡은 기관으로 1178년(고려 명종 8)과 1217년(고려 고종 4)의 거란 침입 때 임시로 둔 것이다.
기은사(祈恩使)는 기은 행사를 주관하는 신하를 일컫는다. 국무당은 고려후기와 조선시대 국가 행사로서 굿을 주관하게 하기 위해 도성 안에 두었던 무당이다. 기은은 여말선초에 성리학의 영향으로 음사(淫祀)라 하여 폐지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부터 왕실의 공식적인 행사로 격상되었으나 중종 때 다시 폐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때는 송악·목멱·백악 등의 산에서 기은제를 지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내시를 연복사(演福寺)와 낙산사(洛山寺), 왕륜사(王輪寺) 등에 보내 재계(齋戒)하고 복을 빌게 하였다. 공양왕은 즉위 이래 매월 삭망일(朔望日)에 궁 안에 승려를 불러 불경을 강의하게 하고, 매 사시(四時) 때면 13개소에서 기은하게 하였는데, 이를 도량[道場]·법석(法席)·별기은(別祈恩) 등으로 불렀다. 이때마다 대신과 대간들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조선전기에는 전조(前朝)인 고려를 이어받아 덕적·백악·송악·목멱·감악·개성 대정·삼성(三聖)·주작(朱雀) 등지에서 봄·가을로 기은하게 했는데, 매양 환시(宦寺)·무녀·사약으로 하여금 제사하게 하고, 여악(女樂)을 베풀게 하였다.
1411년(태종 11) 5월 23일에 임금이, "송악·덕적·감악 등 명산의 신에게 축문을 쓰고 신하를 보내어 분향하게 하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전조 이래로 내행기은(內行祈恩)이라 일컬어 사절(四節)을 당할 때마다 양전(兩殿)께서 내신(內臣)과 사약, 그리고 무녀로 하여금 몰래 이름도 없는 제사를 행하여 왔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만두지 아니하니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다. 전조의 사전(祀典)에 실린 것을 상고하여 시종과 본말을 모두 써서 아뢰라. 내 마땅히 예로써 행하겠다."고 하면서 사전에 없는 기은행사를 혁파하라고 예조에 명하였다(『태종실록』 11년 5월 23일).
태종은 같은 해 7월 15일, "신(神)은 예가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널리 고전을 상고하여 모두 파하고 내시별감으로 하여금 향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5일 덕적산과 감악산 및 개성 대정의 제례를 정하였다(『태종실록』 11년 7월 15일).
1434년(세종 16) 3월 1일 예조 판서신상(申商)이, 중궁에서 별기은(別祈恩), 즉 별도로 복을 비는 것은 사전에 없기 때문에 예조에서 관할하기는 부적절하므로 승정원에서 맡아할 것을 건의하였다(『세종실록』 16년 3월 1일). 이후 세종은 "음사(淫祀)가 이미 모두 혁파되었는데도 연말에 산천에 기은하는 일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과인을 위해 복을 비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반드시 복을 얻는다 하더라도 또한 잘못된 일인데 더구나 결코 얻을 수 없는 일이겠는가."하고 곧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산천에서 기은하는 관행이 사라진 것은 중종 때의 일이다. 1516년(중종 11) 2월 23일 윤자임(尹自任)이, "신이 함경도에 머물면서 보니, 영흥은 선왕께서 입신개국(立身開國)한 고장이고 함흥도 그런데 서울에서 내려온 본궁(本宮)의 별차(別差)라는 자가 흑단령을 입고 또 대모(大母)라는 자는 자의(紫衣)를 입고서 의장(儀仗)을 갖추고 크게 거동하여 성황당에서 기은하였습니다. 비록 그 유래가 오래라고는 하나 풀이 우거진 황폐한 사당에 절을 하고 야외로 돌아다니면서 기은한다고 일컬으니 어찌 제왕으로서 이렇게 기은하는 자가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후 이러한 관행들은 좌도(左道)로서 배척되었다(『중종실록』 11년 2월 23일).
또한 1515년(중종 22) 4월 18일 무녀가 궁액(宮掖)을 드나들며 혹은 기은을 하고 혹은 푸닥거리를 하므로 사헌부가 추국하여 죄를 주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국무당(國巫堂)에 의한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이 있다(『중종실록』 22년 4월 18일). 이러한 경우는 이전에는 별기은으로 표현되었다.
절차 및 내용
『동국이상국집』 권39 초소(醮疏)에는 다음과 같은 「기은직수배성문(祈恩直宿拜星文)」이 실려 있다.
"음양(陰陽)의 기를 조정하여 상궁(上穹)에 형상을 나타내고 갑을(甲乙)의 차례에 따라 하계(下界)의 사람을 관장합니다. 생각건대 미약한 자질이 다행히도 신명이 강림하시는 영광에 힘입어 정성을 더하여 특별히 재명(齋明)의 제사를 베풀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의식을 행하오니, 무릇 선유(仙遊)를 굽어보시고 차린 재물을 모두 흠향하신 후 하늘이 보우하여 큰 복을 내려주시고 향국(享國)이 장구하여 태평의 경사가 보존되게 하소서."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