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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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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전향축 |
한글표제 | 전향축 |
한자표제 | 傳香祝 |
상위어 | 제향(祭享) |
하위어 | 축(祝), 향(香) |
관련어 | 교서관(校書館), 전향사(典享司), 향실(香室) |
분야 | 왕실/왕실의례/길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전향축(傳香祝)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3년 6월 28일 |
조선시대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 왕이 서명한 축문과 향을 헌관(獻官)에게 전달하는 의식.
개설
조선시대 사전(祀典)에 게재된 국가 제사는 왕이 축문에 서명을 하여 향과 함께 헌관에게 전달하면 이를 가지고 거행하였다. 향은 제향에서 신을 부르는 의물(儀物)이며 축문은 신에게 아뢰는 글이다. 향축의 준비는 교서관(校書館)에서 담당하였다. 정전 곁에 마련된 향실(香室)에서 교서관 관원이 숙직하며 축문을 작성하고 향을 제향별로 밀봉[封裹]하여 올리면 왕이 직접 서압(署押)을 한 후 헌관에게 전하였다. 왕이 향축을 전하는 의식은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대사(大祀)와 중사(中祀)에는 왕이 향축을 직접 전하고 그 나머지는 승지(承旨)가 대신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왕이 직접 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며 왕이 서압한 것을 승지가 전하든지 승지가 대압(代押)하여 헌관에게 전하였다.
연원 및 변천
국가 제사는 왕의 이름으로 제사를 거행하지만 대부분의 제사를 왕이 직접 거행하기보다 왕의 명을 받은 관리들이 섭행으로 거행하였다. 왕은 축문에 서명을 한 후 향과 함께 헌관에게 직접 전달하는 의식을 통하여 정성을 나타내고 제사의 주관자임을 보여주었다. 조선초기부터 이러한 전향축의 의식에 왕들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 정종은 조복(朝服)을 입고 향축을 전하라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태종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로 하여금 전향의 의식을 집례(執禮)하도록 하였다. 1431년(세종 13)에 세종은 제향 한 달 전에 미리 축문에 친압, 즉 서압하는 것을 제향 때에 이르러 친압하는 것으로 바꾸었다(『세종실록』 13년 6월 28일). 그리고 『세종실록』 「오례」에 ‘전향의(傳香儀)’가 수록되었다. 이에 의하면 대사와 중사 중 풍운뢰우(風雲雷雨), 선농(先農)과 선잠(先蠶)에 대한 제사와 우사(雩祀),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孔子) 등에게 올리는 제사인 석전(釋奠)에는 왕이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향축을 직접 전달하였다. 그리고 대사인 경우 종친과 백관도 이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 외 나머지 중사는 내전(內殿)에서 왕이 친히 전하고, 소사에는 외정(外庭)에서 승지가 대신 전하였다. 이러한 전향의는 『국조오례서례』에서 조금 변형되어 나타난다. 즉, 왕이 친전하는 장소가 근정전이 아닌 편전의 사정전(思政殿)으로 바뀌었으며, 중사 중 풍운뢰우 등 5가지 제향 이외의 것은 소사와 마찬가지로 외정에서 승지가 대신하였다. 그러나 왕이 향축을 직접 전하는 의식은 성종대를 지나면서 줄어들다가, 조선후기 영조와 정조대에 이르러 다시 강조되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환관을 지방의 제향을 위해 향축을 전하는 전향사(傳香使)로 자주 보냈었는데 이로 인한 폐해가 자주 지적되었다. 성종대에는 충찬위(忠贊衛)와 충의위(忠義衛)로 전향별감(傳香別監)을 삼았으나 이들 역시 비천하여 체모를 잃게 하는 경우가 많아 담당자 선발에 신중을 기하였다. 지방의 경우 제향 때마다 향축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1년에 두 차례로 나누어 보냈다. 관상감(觀象監)에서 한 해 상반기(1~6월), 하반기(7~12월)의 제례력(祭禮曆)을 올리면 예조(禮曹)에서 각 도에 거행할 제사를 미리 예상하여 향축을 준비하였다. 상반기 제향은 10월경, 하반기 제향을 4월경에 준비하여 왕의 서압을 받아 내려 보냈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서례』에 의하면 전향축의 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교서관 관원이 올린 축문에 서압하는 것이다. 왕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자리에 나아가 전교서(典校署) 관원이 올린 축판에 서명하면 근시(近侍)가 축판과 향을 받들어 책상에 둔다. 두 번째 의식은 향축을 헌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왕이 꿇어앉으면 근시가 향축을 꿇어앉아 왕에게 올리고, 왕이 이를 받아 초헌관(初獻官)에게 준다. 초헌관 역시 꿇어앉아 이를 받고 일어났다. 왕이 일어나 국궁(鞠躬)하면 초헌관이 향축을 가지고 중문으로 나와 향축을 향정(香亭)에 실고 제소(祭所)로 갔다. 제소에 도착한 향축은 재실의 감실에 보관하였다가 제향 때 사용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고려시대부터 지방의 산천과 성황에 대한 제사가 국가 사전에 올려지면 왕이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조선으로 전승된 향축의 전달 의식은 왕의 제사권을 상징하였으며, 이는 중앙집권화된 조선의 국가 제사의 특징을 잘 드러내준다. 중앙에서 향축을 전달하면 이를 가지고 가는 관원을 지방의 관리들이 맞이하는 의식과 제소에서 향축을 받아 보관하고 전축(塡祝)하는 의식 등은 민가에서 볼 수 없는 국가 제사만의 독특한 성격이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규장각지(奎章閣志)』
- 『제등록(祭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