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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584년(선조 17)~1638년(인조 16) = 55세].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김인빈(金仁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이며, 친언니는 정신옹주(貞愼翁主)이다. 친남동생은 의창군(義昌君)이고, 친여동생은 [[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이다. 부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해숭위(海嵩慰)[[윤신지(尹新之)]]이다. 인조(仁祖)의 고모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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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584년(선조 17)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선조와 김인빈의 사이에서 4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선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므로, 선조로부터 친히 『소학(小學)』, 『여훈(女訓)』, 『서사(書史)』 등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정혜옹주의 봉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 정혜옹주는 피난 생활을 경험해야 하였다. 당시 정혜옹주는 8세의 어린 나이였는데, 피난길이 어수선하고 말을 준비할 수 없어, 선조가 관리들에게 자원하여 다른 길로 데리고 가서 난리를 피하게 하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내수사(內需司)]] 관원 [[윤백상(尹百祥)]]이 정혜옹주를 모시고 갖은 황해도 산길을 통해 적을 피한 뒤 그해 겨울 의주(義州) 에 이르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10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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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인조(仁祖)가 즉위한 후 시아버지 윤방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정혜옹주와 부마 윤신지는 한동안 큰일 없이 지냈으나,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부체찰사(副體察使)였던 윤방의 동생 윤훤(尹暄)이 전쟁 당시 안주(安州)를 빼앗기면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윤훤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었는데, 정혜옹주가 적극적인 구명 운동을 펼쳤음에도 윤훤은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그리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정혜옹주는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차남 윤구(尹坵)가 남한산성에서 방어에 진력하다가 병들어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32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혜옹주는 이를 슬퍼하다 병이 들어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仁祖)가 정혜옹주에 대해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자, 신하들이 정혜옹주 외에도 여러 왕족들이 죽었으나 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며 반대를 하였으나, 인조는 자신의 명대로 시행토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11018_002 『인조실록』 16년 11월 18일]) | |
− | 정혜옹주의 | + | =='''묘소 및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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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혜옹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제청마을에 부마 윤신지의 묘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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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혜옹주는 윤신지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는데, 1남은 [[윤지(尹墀)]]이고, 2남은 윤구이다. 정혜옹주가 1남인 윤지를 낳았을 때, 선조는 기뻐하며 어제(御製) 7언 [[근체시(近體詩)]]를 내려주었다. 한편 윤지의 딸은 김익겸(金益謙)과 혼인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영의정을 지낸 김만기(金萬基)로 숙종(肅宗)의 정비(正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다. 차남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김만중(金萬重)이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 * | +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 | *『인조실록(仁祖實錄)』 |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
− | *지두환, |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 *『서석집(瑞石集)』 | ||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 | *『택당집(澤堂集)』 | ||
+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 | ||
− | [[분류:왕족]][[분류:옹주]][[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 | + | [[분류:왕족]][[분류:옹주]][[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인조]] |
2018년 1월 11일 (목) 08:16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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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혜옹주 |
한글표제 | 정혜옹주 |
한자표제 | 貞惠翁主 |
분야 | 왕족/옹주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정주영 |
봉작 | 정혜옹주(貞惠翁主)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584년(선조 17) |
사망 | 1638년(인조 16)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
증조부 | 중종(中宗) |
조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부 | 선조(宣祖) |
모_외조 | 김인빈(金仁嬪) |
형제 | (오라버니)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언니)정신옹주(貞愼翁主) (남동생)의창군(義昌君) (여동생)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 |
자녀 | (1남)윤지(尹墀) (2남)윤구(尹坵)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혜옹주(貞惠翁主)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인조실록』 16년 11월 18일 |
총론
[1584년(선조 17)~1638년(인조 16) = 55세].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김인빈(金仁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이며, 친언니는 정신옹주(貞愼翁主)이다. 친남동생은 의창군(義昌君)이고, 친여동생은 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이다. 부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해숭위(海嵩慰)윤신지(尹新之)이다. 인조(仁祖)의 고모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1584년(선조 17)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선조와 김인빈의 사이에서 4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선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므로, 선조로부터 친히 『소학(小學)』, 『여훈(女訓)』, 『서사(書史)』 등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정혜옹주의 봉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 정혜옹주는 피난 생활을 경험해야 하였다. 당시 정혜옹주는 8세의 어린 나이였는데, 피난길이 어수선하고 말을 준비할 수 없어, 선조가 관리들에게 자원하여 다른 길로 데리고 가서 난리를 피하게 하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내수사(內需司) 관원 윤백상(尹百祥)이 정혜옹주를 모시고 갖은 황해도 산길을 통해 적을 피한 뒤 그해 겨울 의주(義州) 에 이르렀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1596년(선조 29) 정혜옹주는 해평 윤씨(海平尹氏)윤방(尹昉)의 아들 윤신지와 혼인하였는데, 부마 윤신지는 해숭위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아버지 윤방은 대표적인 서인(西人)으로,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廢妃)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런 가운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자 윤방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고, 정혜옹주와 부마 윤신지 또한 선조가 광해군 대신 김인빈이 낳은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던 일이 더해져서 광해군 대에는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었다.
인조(仁祖)가 즉위한 후 시아버지 윤방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정혜옹주와 부마 윤신지는 한동안 큰일 없이 지냈으나,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부체찰사(副體察使)였던 윤방의 동생 윤훤(尹暄)이 전쟁 당시 안주(安州)를 빼앗기면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윤훤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었는데, 정혜옹주가 적극적인 구명 운동을 펼쳤음에도 윤훤은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그리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정혜옹주는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차남 윤구(尹坵)가 남한산성에서 방어에 진력하다가 병들어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32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혜옹주는 이를 슬퍼하다 병이 들어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仁祖)가 정혜옹주에 대해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자, 신하들이 정혜옹주 외에도 여러 왕족들이 죽었으나 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며 반대를 하였으나, 인조는 자신의 명대로 시행토록 하였다.(『인조실록』 16년 11월 18일)
묘소 및 후손
정혜옹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제청마을에 부마 윤신지의 묘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정혜옹주는 윤신지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는데, 1남은 윤지(尹墀)이고, 2남은 윤구이다. 정혜옹주가 1남인 윤지를 낳았을 때, 선조는 기뻐하며 어제(御製) 7언 근체시(近體詩)를 내려주었다. 한편 윤지의 딸은 김익겸(金益謙)과 혼인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영의정을 지낸 김만기(金萬基)로 숙종(肅宗)의 정비(正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다. 차남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김만중(金萬重)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서석집(瑞石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택당집(澤堂集)』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