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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0일 (수) 00:1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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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양응락 |
한글표제 | 양응락 |
한자표제 | 梁應洛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경순 |
자 | 심원(深源) |
호 | 만수(漫叟)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2년(선조 5) |
사망 | 1619년(광해군 11) 12월 30일 |
본관 | 남원(南原)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양윤영(梁允英) |
조부 | 양사경(梁思敬) |
부 | 양근(梁謹) |
모_외조 | 함종 어씨(咸從魚氏) : 어계선(魚季瑄)의 딸 |
형제 | (동생)양응명(梁應溟) |
처_장인 | (첫째 부인)이씨(李氏) →(자녀)무후 (둘째 부인)이씨(李氏) →(자녀)무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양응락(梁應洛) |
총론
[1572년(선조 5)~1619년(광해군 1) = 4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병조 정랑(正郞)과 평산현감(平山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심원(深源)이고, 호는 만수(漫叟)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주판관(洪州判官)을 지낸 양근(梁謹)이고, 어머니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좌참찬(左參贊)어계선(魚季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양사경(梁思敬)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양윤영(梁允英)이다.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인 양성지(梁誠之)의 6대손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35세인 1606년(선조 39)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39년 10월 1일] 그해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된 뒤, 호조(戶曹)좌랑(佐郞)과 예조(禮曹) 좌랑을 역임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9년 10월 11일, 선조 39년 12월 6일] 그리고 이듬해인 1607년(선조 40)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선조실록』선조 40년 윤6월 12일, 『계곡집(谿谷集)』 권12 「통정대부분승정원승지증가선대부 이조참판양공묘갈명(通政大夫分承政院承旨贈嘉善大夫吏曹參判梁公墓碣銘)」 이하 「양응락묘갈명」]
이후 병조의 낭관(郎官)으로 3년 동안 재직하였는데, 이때 기근이 발생하여 기민(饑民)을 진휼할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권세가가 뇌물을 주며 곡식의 조전(漕轉)과 관련하여 청탁을 하였으므로 일체 거절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양응락(梁應洛)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좌천되었으나, 곧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정랑(正郞)으로 있다가, 다시 평안도희천군수(熙川郡守)로 나가게 되었다.[「양응락묘갈명」] 평안도 희천군은 초피(貂皮)와 인삼이 생산되는 곳이었는데, 관리들의 탐학으로 백성들이 큰 고초를 겪고 있었다. 양응락은 부임 후 청렴한 생활을 하며, 군민의 요역(繇役)과 부세(賦稅)를 줄이고, 인삼을 여타 공부(貢賦)와 대체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 결과 도내(道內)의 정사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으므로, 1617년(광해군 9) 조정에서는 선치(善治)에 대한 포상으로 가자(加者)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삼았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9년 6월 21일, 「양응락묘갈명」]
이후 1618년(광해군 10) 승정원(承政院) 분승지(分承旨)에 임명되었다가, 곧 평산현감(平山縣監)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5월 11일] 이때에도 군민 통솔에 힘썼으나 병에 걸리는 바람에 1619년(광해군 11) 섣달 그믐날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8세였다. 1620년(광해군 12) 평산을 다스린 치적이 인정되어 가자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판(參判)으로 추증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1월 18일, 「양응락묘갈명」]
성품과 일화
양응락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차분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음은 물론 그 청렴하고 결백함이 아주 뛰어났다. 성격이 매인 데가 없어 타고난 그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하면서 평소 외물(外物) 때문에 마음속으로 개의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생활하다가도, 막상 관직을 수행하며 법을 집행할 때나 몸단속을 하여 절조를 세워야 할 때에 이르면 단연코 그의 뜻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양응락묘갈명」] 통정대부로 가자되었을 때는 본디 청렴하고 성실한 사람이며, 고을살이하면서 재물을 취한 곳이 없고 집안에서는 착한 행실이 있었으니, 통정대부의 자급이 참으로 걸맞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9년 6월 21일]
전해지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1607년(선조 40)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 사자(使者)가 평소 양응락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 양응락의 복색(服色)이 변변찮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양가죽 옷 한 벌을 선사하였다. 양응락이 이를 물리칠 수 없어 입고 있다가 돌아올 즈음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게 되자 곧장 벗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전한다.[「양응락묘갈명」]
묘소와 후손
양응락의 묘소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선영에 있으며, 장유(張維)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양응락묘갈명」]
부인은 두 명이었는데 모두 이씨(李氏)로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양응락은 이들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양응락묘갈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