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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일 (화) 23:55 기준 최신판



평안도 의주 인산에 있는 첨사진.

개설

인산은 의주 부근의 강변에 있었으며 지인산군사(知麟山郡事)가 파견된 곳이었다. 인산군은 1450년(문종 즉위)에 거주민이 많지 않다 하여 의주와 합쳤다. 그러다가 논란이 있자 1451년(문종 1)에 일단 인산성(麟山城)에 만호(萬戶)를 두는 것으로 했다. 1452년(단종 즉위)에 의주에 붙였던 것을 다시 이름을 회복하고 수령을 파견했다. 이후 1455년(세조 1)에 다시 의주에 붙여 의주의 속진(屬鎭)으로 삼고 첨절제사를 파견했다. 중종대 들어 인산진첨사는 방어 대신 둔전 경작에 치중했다.

위치 및 용도

인산의 사방 경계는 동·서·북쪽으로 의주에 이르는데, 동쪽이 2리(약 0.8㎞), 서쪽이 11리(약 4.3㎞), 북쪽이 10리(약 4㎞)이며, 남쪽으로 용천(龍川)에 이르는데, 15리(약 5.9㎞)이다. 인산으로부터 무창(茂昌)에 이르기까지는 1천여 리(약 393㎞)이다. 인산은 의주·용천·정녕·철산 등 네 고을과 함께 의주도(義州道)의 중앙지역에 위치하는 중익(中翼)에 속해 있었다. 지인산군사(知麟山郡事)가 파견되었다. 연변의 요해처이지만 내지 방어에 있어 긴요한 곳은 아니었다. 1444년(세종 26)에 읍성을 강변으로 옮기면서 중국과 경계를 접하고 또 해구가 드나드는 통로가 되었다.

변천 및 현황

1447년 인산을 평안도 상긴(上緊)으로 하고 이산(理山)·벽동(碧潼)·창성(昌城)·정녕(定寧)·의주 등과 함께 삭천도(朔川道)에 붙였다. 상긴은 세종 때 고을을 상긴, 중긴, 하긴으로 구분하여 무관 임명을 차등을 두던 제도이다. 상긴에는 반드시 무과 급제자나 무재록에 올라 있는 자를 관리로 임명했으며, 중긴 이하는 꼭 무과에 급제하지 않았더라고 재주가 있으면 뽑아 쓸 수 있게 하였다. 1450년에는 인산군이 의주에 인접해 있지만 거주민이 많지 않으므로, 의주에 흡수시켰다. 이듬해 인산을 폐지한 것에 대해 반대가 있자 인산성(麟山城)에 만호를 두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1452년에 다시 이름을 회복하고 수령을 파견했다. 1455년에는 의주도(義州道)의 중익으로 삼았다. 1455년에 다시 의주에 병합시켰다. 1466년(세조 12)에 인산군을 혁파하고 의주의 속진이 되었다. 첨절제사가 파견되었다.

본래 인산과 의주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성안에 들여보내 살도록 하였으나, 인산은 적의 침입로와는 거리가 멀다 하여 1458년(세조 4)에는 인산의 주민은 성안에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1469년(예종 1) 4월 인산진 성을 수축하도록 하였으며(『예종실록』 1년 4월 12일), 1475년(성종 6)에는 인산과 의주 사이 60리(약 24㎞)의 땅이 넓고 평편한 들판이어서 적이 침입해 오는 데 막힘이 없다는 이유로 의주부터 시작해 인산을 거쳐 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다가 1490년(성종 21) 10월 의주 이상부터 인산까지 옛 성의 남은 터에 장성(長城)을 쌓도록 했다. 1492년(성종 23) 인산의 첨절제사(僉節制使)는 의흥위(義興衛)사용(司勇)에서 차출하도록 했다(『성종실록』 23년 1월 12일). 1508년(중종 3) 10월 무렵에는 인산에서 방어하는 일을 그만두었다(『중종실록』 3년 10월 17일).

인산진에는 바다 어구에 둔전(屯田)이 있었다. 그 둔전은 땅이 비옥하여 곡식이 잘되었다. 둔전 경작의 감독은 본진의 첨사가 근실하고 재주와 도량이 있는 자를 골라 하도록 했다. 또 본도 도사(都事) 및 의주목사(義州牧使)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단속하게 하고, 1년에 두 번, 즉 6월과 12월에 이조와 병조에서 세금으로 거두는 곡식을 살펴서 아뢴 뒤 내용을 따져 상과 벌을 시행하고, 경작에 관한 규정은 관련 부서가 마련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인산은 관방(關防)의 요지이고 또 중국인들이 몰래 통행하는 길목이었다. 인산의 둔전은 중국의 탕참(湯站)과 가까웠다. 때문에 탕참 사람들이 몰래 그곳에서 서로 사무역을 했다. 인산진 사람이 중국 사람과 몰래 교역하다가 잡히면, 사형을 받기도 하였다.

형태

세종대에는 인산군에 성이 없었는데, 이후에 성이 수축된 듯하다. 1491년(성종 22) 10월 당시 인산진 성은 높이가 10자(약 3m)이고 둘레가 9,027자(약 2.8㎞)이었다. 인산진 경내에는 대모성(大母城)이 있었고, 연대(煙臺)가 있었다(『성종실록』 22년 10월 29일).

관련사건 및 일화

1584년(선조 17) 2월 전 평안도병사(平安道兵使)이제신(李濟臣)이 의주 인산진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제신은 1583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왔을 때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당시 패전하여 그 책임을 물어 인산진에 유배 와 있었다. 이제신은 몸가짐에 청렴한 지조가 있어 죽은 뒤에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적이 갑자기 침입했을 때도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군율이 매우 엄하여 장병들이 그의 명을 잘 따랐다. 이때에 그의 직첩을 돌려주었다(『선조실록』 17년 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