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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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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남수 |
한글표제 | 송남수 |
한자표제 | 宋柟壽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영로(靈老) |
호 | 송담(松潭)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7년(중종32) |
사망 | 1626년(인조4) |
본관 | 은진(恩津) |
주거지 | 충청도 회덕(懷德) |
묘소소재지 | 충청도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 |
증조부 | 송요년(宋遙年) |
조부 | 송여림(宋汝霖) |
부 | 송세훈(宋世勛) |
모_외조 | 영일정씨(迎日鄭氏): 정난년(鄭鸞年)의 딸 |
형제 | (8촌)송기수(宋麒壽), 송귀수(宋龜壽), 송인수(宋麟壽) |
처_장인 | (첫째부인)전의이씨(全義李氏): 이한(李翰)의 딸 (둘째부인)진주유씨(晉州柳氏): 유형필(柳亨弼)의 딸, 유차달(柳車達)의 후손 →(자녀)3남 2녀 |
자녀 | (1자)송희원(宋希遠) (2자)송희건(宋希建) (3자)송희진(宋希進) (1녀)이명(李溟)의 처 (2녀)김광유(金光裕)의 처 |
저술문집 | 『송담집(松潭集)』, 『검신요결(檢身要訣)』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남수(宋柟壽) |
총론
[1537년(중종32)∼1626년(인조4) = 90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영로(靈老), 호는 송담(松潭)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아버지는 안악군수(安岳郡守)송세훈(宋世勛)이고, 어머니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진사 정난년(鄭鸞年)의 딸이다. 군수송여림(宋汝霖)의 손자이고 목사(牧使)송국전(宋國銓)의 조부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578년(선조11) 나이 42세에 음보(蔭補)로 사포서(司圃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가 의영고(義盈庫)직장(直長)으로 옮겼다. 상의원(尙衣院)주부(主簿)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하였는데, 문과 출신이 아니면서 대간(臺諫)에 임명된 것이다.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갔다가, 종부시(宗簿司) 주부(主簿) · 상의원(尙衣院) 판관(判官)을 거쳐, 평시서(平市署)영(令)과 호조 정랑을 역임하면서 물가와 재정을 맡아보았다. 통천군수(通川郡守) 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를 기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임천군수(林川郡守)로 있었다. 1601년(선조15) 나이 65세 때 왜적이 충청도로 대거 침입하자, 주장(主將)을 구하지 않고 도망한 수령관 가운데 하나로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고, 엄중하게 치죄(治罪)를 받았다.
그 이후 벼슬에 진출할 뜻을 버리고 고향 회덕으로 돌아가서 25년 동안 한가로이 지냈다. 그는 회덕의 은진송씨(恩津宋氏) 적장자로서 6대조 송유(宋愉)의 재실인 쌍청당(雙淸堂)을 중수하여 주위에 소나무(松) · 국화(菊) · 매화(梅) · 대나무(竹) 등을 심어놓고 그 사이에서 석주(石洲)권필(權韠) 등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짓고 90세까지 여생을 보냈다. 1607년(선조40) 나이 70세가 되자, 관례에 따라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고, 1616년(광해군8) 나이 80세가 되자, 규정에 의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1626년(인조4) 나이 90세가 되자, 자제들이 은자(恩資)를 청원하니, 인조가 이례적으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그해 겨울에 고향 회덕에서 죽으니, 향년이 90세였다.
그는 옛날 현인(賢人)들의 언행을 초록하여 『검신요결(檢身要訣)』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송담집(松潭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송남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맑은 지조가 있어서 평생 말도 빨리 하지 않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사물(事物)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수행(修行)만을 좋아하였으므로, 향당(鄕黨)에서는 그의 효도와 우애를 칭찬하고, 친구들은 그의 청렴과 소박(疏薄)을 좋아하였다. 함께 교유(交遊)한 사람들이 모두 한 시대의 이름난 명사들이었는데, 그의 문집에는 이름난 인사들이 그를 위해서 지은 글들이 본인의 글보다 훨씬 많다.
젊었을 때 벼슬살이를 하다가도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훌쩍 홀로 찾아갔으며, 모든 사물에 감촉되거나 좋은 기회를 만나면 반드시 시를 읊었다. 그 풍류(風流)가 아주 대단하여, 명절이나 좋은 계절에는 술을 마련하고 벗을 불러서 한껏 즐겼는데, 그 말과 즐거움을 모두 시(詩)로 표현하였다. 일생 동안 일찍이 남들이 싫어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소리가 한 번도 없었다. 그와 먼 친척 사이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어렸을 적에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언제나 쌍청당(雙淸堂)에 가서 뛰어 놀았는데, 늙은 노인이 언제나 뜰을 깨끗하게 쓸고 오롯하게 앉았던 담담한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송시열은 술회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의 묘원에 있는데,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다. 8촌 송기수(宋麒壽)의 외손자 영의정신흠(申欽)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둘째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유형필(柳亨弼)의 딸로 그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송희원(宋希遠)은 성균관 학유(學諭)를 지냈고, 장녀는 호조 판서이명(李溟)의 부인이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담집(松潭集)』
- 『상촌집(象村集)』
- 『간이집(簡易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사계전서(沙溪全書)』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석주집(石洲集)』
- 『오음유고(梧陰遺稿)』
- 『충암집(冲庵集)』
- 『월정집(月汀集)』
- 『서경집(西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