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원(宋希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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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5년(명종20)∼1623년(인조1) = 59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의백(毅伯)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충청도 회덕(懷德) 송촌(宋村) 출신이다. 아버지는 송담(松潭)송남수(宋枏壽)이고, 어머니 진주유씨(晋州柳氏)는 선무랑(宣務郞)유형필(柳亨弼)의 딸이다. 안악군수(安岳郡守)송세훈(宋世勳)의 손자이고, 사헌부 장령(掌令)송희진(宋希進)의 맏형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3년(선조36) 사마시(司馬試)에 3등(等)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 아버지 송남수가 강권하여, 음보(蔭補)로 나아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군자감(軍資監) · 제용감(濟用監)봉사(奉事)를 거쳐,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시대에 정세가 혼미하고 말세(末世)에 공도(公道)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문예(文藝)를 전공하는 것보다 경전(經典)을 수학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이에 모든 일은 제쳐놓고 마음을 기울여 밤낮으로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꿰뚫었다. 그러나 1616년(광해군8) 멋대로 임소(任所)를 떠나는 바람에 역졸이 흩어졌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개시(改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59세였다.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지 못하고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당시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권세가 있는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기를 바랄 수가 없었는데, 승문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균관에 배속된 것은 불리한 인사였다. 이 때문에 그는 몹시 낙망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1623년(인조1) 11월 27일 갑자기 죽으니. 나이가 59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희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선량해서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또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 아버지 송남수가 나이 90세에 이르렀는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그는 온종일 곁에서 모시고 근신(謹愼)하여 비록 한밤중이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 여러 형제자매들과 한 집에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일생 동안 싫어하는 말이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접촉할 때에는 무뚝뚝하여 인정이 없는 듯하였으나, 그들의 허물과 악덕한 일은 못 들은 척하였으므로 남의 명예를 헐뜯는 일이나 시비(是非)를 말하는 일이 없었다. 친척인 송시열(宋時烈)은 그에 관하여 “내가 어렸을 적에 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얀 체 아버지 송담공을 모시는 것을 멀리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 두 어른의 용모는 늙어서 뚜렷이 구분하지는 못하겠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주자(朱子)가 말씀하신 바, ‘머리털이 하얀 아들이 때때옷을 입고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한다. 이런 광경은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의 선영에 있는데, 동향(同鄕)의 가까운 친척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는 목사(牧使) 김찬선(金纘先)의 딸인데,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송국전(宋國銓)은 목사(牧使)를 지냈는데, 그 아들 송규렴(宋奎濂)은 예조 판서를 지냈고, 그 손자 송상기(宋相琦)는 이조 판서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담집(松潭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우계집(牛溪集)』
  • 『병와집(甁窩集)』
  • 『제월당집(霽月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