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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2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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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서기 |
한글표제 | 서기 |
한자표제 | 徐起 |
분야 | 학자, 사회·신분/노비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대가(待可) |
호 | 고청(孤靑), 고청초로(孤靑樵老), 구당(龜堂), 이와(頤窩) |
출신 | 천인, 노비 |
성별 | 남자 |
출생 | 1523년(중종18) |
사망 | 1591년(선조24) 11월 14일 |
본관 | 이천(利川) |
주거지 | 충청도 홍주(洪州) 상전리(上田里) |
부 | 서귀령(徐龜齡) |
저술문집 | 『고청유고(孤靑遺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서기(徐起) |
총론
[1523년(중종18)∼1591년(선조24) = 69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천인 출신 학자.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孤靑), 또는 구당(龜堂) · 이와(頤窩)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인데, 공주계룡산(鷄龍山) 고청봉(孤靑峰) 아래 살았다. 아버지는 서귀령(徐龜齡)이고, 토정(土亭)이지함(李之菡)의 수제자이다.
토정 이지함의 수제자
본래 좌정승심열(沈悅)의 집안 종이었다. 비범한 재주를 타고나서 어려서부터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주인집의 허락을 얻어 7세 때에 마을의 서당(書堂)에 가서 글을 배웠다. 점점 자라면서 혼자서 학문에 힘써서 백가(百家)의 학설(學說)을 두루 섭렵하였다. 나이 20여 세에 이르러 토정이지함을 만나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비로소 성리학의 정론(正論)을 배우면서 선학(仙學)을 버리고 유학의 정도(正道)를 닦았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사방(四方)의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면서 그로부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전수 받았다. 제주도한라산(漢拏山) 꼭대기까지 가서 지리를 살펴볼 정도로 가보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이렇게 우리나라 남쪽 끝까지 다 둘러보고 돌아와서, ‘토정비결’을 다시 정리하였다. 노비 출신으로서 가난하여 학문에 전력하지 못하는 제자 서기를 훌륭한 학자로 키우기 위하여 이지함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다. 이지함은 제자 서기로 하여금 이소재(履素齋)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 들어가서, 『대학(大學)』 · 『중용(中庸)』 등 여러 경서(經書)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항상 이지함은 제자 서기가 학문을 성취할 수 있도록 정신적 ·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정사
그는 3년 만에 일단 학업을 성취하고, 고향 홍주(洪州) 상전리(上田里)로 돌아왔으나, 노비의 신분이므로 과거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마을 안에 강학(講學)을 베풀고 향약(鄕約)을 시행할 곳을 만들어 ‘강신당(講信堂)’이란 이름을 짓고 학도(學徒)를 가르치며 풍속을 교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향리의 불량한 젊은이들이 그를 노비라고 꺼리고 미워하여 몰래 불을 질러서 그 집을 태워버렸다. 그는 향리를 교화할 수 없음을 알고, 또 뜻밖의 화(禍)가 있을까 걱정하여,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智異山)의 홍운동(紅雲洞)으로 들어갔다. 홍운동은 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강학만은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먼 곳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유학(遊學)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들이 찾아오기가 너무 불편하였다. 4년 만에 그곳에서 나와서 계룡산의 고청봉 아래 공암동(孔巖洞)으로 옮겼는데, 충청도 여러 고을의 자제들이 몰려와서 글을 배우고,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그의 서당을 찾아오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고, 향시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났다. 그는 계룡산 고청봉 아래 오래 살면서 스스로 호(號)를 고청, 또는 고청초로(孤靑樵老)라고 하였다.
중봉 조헌의 추천
조헌(趙憲)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청도 의병대장으로서 금산(金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학자인데, 그와의 인연이 『송자대전(宋子大全)』과 조헌의 행장에 소개되어 있다. 1572년(선조6) 조헌이 문과에 급제하고 초사(初仕)한지 얼마 안 되어 토정이지함을 뵈러 갔다가, 그의 소개로 함경도두류산(頭流山)에 있던 처사(處士)서기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때 서기는 50세이고, 조헌은 29세였는데, 여기에서 두 사람이 조용히 학문을 강론하니, 젊은 조헌의 학문이 날로 진보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두 사람은 학문적 교유를 계속하였다.
1586년(선조19)에는 공주(公州)의 주학제독관(州學提督官)으로 임명된 조헌이 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는 상소에서 “신의 관하 공주는 공암정사(孔巖精舍)가 있고, 서천(舒川)에는 명곡정사(鳴谷精舍)가 있습니다. 공암정사에는 양인(良人) 서기라는 자가 가르치는데, 그는 일찍이 이중호에게 배워서 학문이 넓고 행실이 온전하여 인근에서 그에게 배운 자 중에서 생원·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곡정사는 특별히 가르치는 스승이 없으니, 구봉(龜峯)송익필(宋翼弼)을 수소문하여 찾아내어 명곡서원의 훈장으로 삼는다면, 신이 10년 동안 제독을 맡은 것보다 더 나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588년(선조21)에는 조헌의 추천으로 서기와 송익필이 양사기(楊士奇)와 서익(徐益)을 이어 군중(軍中)에서 군기(軍機)의 중대한 문제를 보좌하게 하였다.
만년에 그는 남악(南岳)연곡산(燕谷山)의 절에 들어가서 수도하면서 유불선(儒佛仙)의 세계를 두루 섭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591년(선조24) 11월 14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69세였다. 저서로는『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천인 출신으로 유명한 학자들(백대붕白大鵬 · 박인수朴仁壽 · 권천동權千同 · 허억건許億健)을 열거하면서, 서기를 송익필과 함께 노비 출신으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재야의 학자들이라고 하였다.
성품과 일화
서기의 비문에는 그의 자질에 대해 알려줄 만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그가 7세 때 마을의 서당(書堂)에 가서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서당이 장차 없어지게 되자, 그는 시를 지었다. 그중에 ‘서당을 길이 허물지 말아야, 나로 하여금 성현의 글을 배우게끔 하리라.[書堂長勿毁 使我學聖賢]’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스승이 이것을 보고서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또 『성호사설』에는 그와 심열의 인연 및 그 성품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서기가 학문의 명성이 높아진 다음에 옛주인 좌의정심열의 집을 방문했는데, 옛날 노비 때처럼 천한 옷차림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장안의 사대부들이 잇달아 그를 찾아오게 되자, 서기는 곧 주인 심열에게, “천한 옷차림으로는 높고 귀한 분들을 접견할 수 없으니, 의관(衣冠)을 빌려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심열이 흔쾌히 의복을 갖추어 주고, 아주 극진하게 예(禮)로써 대우하였다.
그와 조헌의 인연 및 그 성품을 알려 주는 일화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볼 수 있다. 1591년(선조24) 일본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일본 사신 겐소[玄蘇] 등이 “명나라를 치는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우리나라 사정을 엿보았는데, 온 조정이 당황하여 감히 일본을 배척하고 관계를 끊어버리자고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헌이 분개하여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대궐문 밖에서 3일 동안 일본 사신의 목을 베자고 연달아 상소하였으나, 선조가 화를 내면서 그 상소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조헌이 마침내 물러나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지나는 길에 산림처사(山林處士) 서기를 방문하니, 서기가 크게 꾸짖기를, “토정이 그대를 원대한 그릇이라고 하여, 나도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기대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바로 소인배가 되고자 하는가?” 하고 갑자기 벽을 향해 돌아앉아 말을 하지 않았다. 조헌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나의 상소를 한번 읽어 보시오.” 하니 서기가 머리를 흔들며, “도무지 보고 싶지 않다네.” 하였다. 조헌이 드디어 그 글을 스스로 읽었는데, 반도 채 읽지 못하였을 때, 서기가 벌떡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어 입고 두 번 절하며 사과하기를, “그대의 이번 상소에 힘입어 우리나라가 오랑캐 나라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되었네.” 하고 칭찬하였다.
비문과 추모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수암유고(守庵遺稿)』 권2 「고청거사 서공 묘갈명(孤靑居士徐公墓碣銘)」) 영조 때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유림(儒林)에서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조두(俎豆)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권귀(權貴)들의 추향(追享)할 자가 많아지자, 그의 신주(神主)를 주벽(主壁)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서 강등시켰다. 그러자, 공주의 유림들이 격분하여 따로 사당을 세우고 별사(別祠)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전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고청유고(孤靑遺稿)』
- 『수암유고(守庵遺稿)』
- 『담헌서(湛軒書)』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시정비(時政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