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화(朴枝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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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3년(종종 8)~1592년(선조 25) = 80세)]. 조선 중기 중종·인종·명종·선조 때에 활동한 학자.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菴)이다.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선조 시대 활동

박지화는 젊어서부터 명산(名山)을 유람하였는데, 학자(學者)들과 같이 산사(山寺)에서 머물면서 지냈다.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의 세 가지 학문을 모두 깊이 공부하였다. 특히 예서(禮書)에 정밀하고 해박하였으며 시(詩)와 문장이 모두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친구 정굉(鄭宏)과 같이 백운산(白雲山) 사탄촌(史呑村)으로 피난가서 살았다. 이곳에 왜적(倭賊)이 들어오려고 하니, 정굉은 가족을 이끌고 떠났다. 그러나 박지화는 그대로 있다가 왜적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두보(杜甫)의 시(詩) 오언율(五言律) 한 수를 써서 시냇가 나무에 매달아 놓고 자신은 돌을 품고 나무 아래 시냇물에 빠져 죽었다. 저서로는 『수암유고(守菴遺稿)』, 『사례집설(四禮集說)』 등이 있다.

생활상과 일화

박지화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그는 명산(名山)을 유람하며 소나무 잎만 먹고 곡식을 먹지 않았다. 산사(山寺)에서 머물면서 한 달이 되도록 한 벌의 베옷만 입은 채 밤에는 책을 베개로 삼아 자고 15일 밤은 왼쪽으로, 15일 밤은 오른 쪽으로 누워 자는데, 베옷이 새로 다린 것처럼 구겨지지 않았다. 금강산(金剛山)에서 노닐었을 때 그의 나이 70여 세였으나 몇 발 정도 떨어진 사이도 건너 다녔고 발걸음이 나는 것 같았으므로 산중에 스님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도성 안에 살 때에는 문을 닫고 온종일 방안에 꿇어 앉아 읊조렸으므로 그의 거처가 마치 산림(山林)처럼 적막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부마(駙馬) 광천위(光川尉)김인경(金仁慶)의 만사(挽詞)를 지었을 때에 시인(詩人) 정지승(鄭之升)은 “그 사람은 가문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문장가의 지위는 가장 높다.”라고 칭찬하였다.

제향과 유사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유몽인(柳夢寅)이 유사(遺事)를 지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계곡집(谿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