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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1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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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종민 |
한글표제 | 심종민 |
한자표제 | 沈宗敏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광해군 |
집필자 | 장준호 |
자 | 사눌(士訥) |
호 | 청만(晴灣)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4년(명종 9) |
사망 | 1618년(광해군 10) |
본관 | 청송(靑松)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수양4리 |
증조부 | 심빈(沈濱) |
조부 | 심광언(沈光彦) |
부 | (양부)심호(沈鎬) (생부)심금(沈錦) |
모_외조 | (양모)광주 김씨(光州金氏) : 김홍윤(金弘胤)의 딸 (생모)여흥 민씨(驪興閔氏) : 민희열(閔希說)의 딸 |
형제 | (형)심종도(沈宗道), 심종침(沈宗忱) (동생)심종직(沈宗直), 심종주(沈宗周), 심종의(沈宗毅), 심종준(沈宗準) |
처_장인 | 능성 구씨(綾城具氏) : 구변(具卞)의 딸 →(자녀)2남 3녀 |
자녀 | (1자)심혁(沈) (2자)심집(沈) (1녀)홍서익(洪瑞翼)의 처 (2녀)우기신(禹祇身)의 처 (3녀)정원석(鄭元奭)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종민(沈宗敏) |
총론
[1554년(명종 9)~1618년(광해군 10) = 65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와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 호조 좌랑(佐郞) 등을 지냈다. 자는 사눌(士訥)이고, 호는 청만(晴灣)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친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심금(沈錦)이고, 양아버지는 둘째 작은아버지인 심호(沈鎬)이다. 또한 친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민희열(閔希說)의 딸이고, 양어머니는 광주 김씨(光州金氏)김홍윤(金弘胤)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참찬(左參贊)심광언(沈光彦)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낸 심빈(沈濱)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때의 활동
1576년(선조 9)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방목(榜目』] 1589년(선조 22) 북부참봉(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청음집(淸陰集)』 권33 「개천군수심공종민묘지명병서(价川郡守沈公宗敏墓誌銘幷序)」 이하 「심종민묘지명」으로 약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양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였다가, 평안도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조지서(造紙署)별제(別提)에 임명되었다.[「심종민묘지명」] 이어 검찰사(檢察使)최황(崔滉)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593(선조 26) 의금부 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형장을 남용하였다고 탄핵을 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6년 10월 3일, 「심종민묘지명」] 1595년(선조 28) 양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복상(服喪)을 하고, 다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만기가 되자 선공감(善工監) 직장(直長)이 되었다. 이후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이 되어 명(明)나라 제독(提督)이승훈(李承勛)을 따라 남정(南征)하였다 돌아왔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군자감 주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가 연천현감(漣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 이후 1606년(선조 39)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었다.[「심종민묘지명」]
1614년(광해군 6) 심종민(沈宗敏)은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인 1615년(광해군 7) 이천현감(利川縣監)이 되었는데, 이때 낡은 폐습을 개혁한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6년 9월 25일, 광해군 8년 1월 15일, 「심종민묘지명」] 그리고 얼마 후에 개천군수(价川郡守)로 승진하였으나, 1618년(광해군 10) 병으로 사직하고 서울의 사저(私邸)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5세였다.[「심종민묘지명」]
성품과 일화
심종민은 열 살이 지나 연이어 부모를 여의었는데, 집상(執喪)하는 것이 어른과 다름이 없었다. 이후 할아버지 심광언이 그를 기르다가, 차남인 심호에게 효성이 지극하다면서 후사로 삼아 입양하도록 하였다. 심종민은 양아버지인 심호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을 당하여 집상을 할 때에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 대로 하였다. 한편 이복동생과도 우애가 깊어 친족들이 모두 칭찬하였다고 한다.[「심종민묘지명」] 또한 임진왜란 때는 양어머니를 모시고 산 속으로 피난하였는데, 급박한 가운데도 직접 양어머니를 업고 다니면서 여러 번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양어머니를 위해서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도 떨어지게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평안도 행재소에서 검찰사최항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 행중(行中)의 일을 모두 위임하였다 할 정도로 맡은 바 직임을 잘 처리하였다.[「심종민묘지명」]
연천현감으로 있을 때는 유민(流民)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니, 생업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많았으며, 정읍현감을 역임할 때는 빈민을 구휼하고, 신상필벌을 분명히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어 산음현감 때는 호강(豪强)을 누르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공사(公事)의 처리를 잘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생 소탈하면서 꾸밈이 없어서, 가는 고을마다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심종민묘지명」]
후손 및 묘소
심종민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수양4리에 있는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심종민묘지명」]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봉상시(奉常寺)정(正)구변(具卞)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심혁(沈)은 종친부(宗親府)전부(典簿)를 지냈고, 차남 심집(沈)은 호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장녀는 참의(參議)홍서익(洪瑞翼), 차녀는 우기신(禹祇身), 3녀는 정랑(正郞)정원석(鄭元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심종민묘지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