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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9 판




총론

[1654년(효종5)∼1676년(숙종2) = 23세]. 조선 중기 효종~중종 대의 유일. 자는 문식(文式), 호는 통허재(洞虛齋)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상주(尙州)다. 양부는 백부 성호정(成虎禎)이고, 생부는 우암(尤菴)의 문인 성호영(成虎英)이며, 양모 풍양조씨(豐壤趙氏)는 처사(處士)조흥원(趙興遠)의 딸이고, 생모 덕수이씨(德水李氏)는 통덕랑(通德郞)이동야(李東野)의 딸이다.

유일 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적인 재질이 있어서 3, 4세에 글을 읽었고 5, 6세가 되어서 연구(聯句)를 해득하였으며 8, 9세에는 훌륭한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가 12세에 지은 「수석정기(水石亭記)」는 매우 유명하여 『여지신편(輿地新編)』에도 실려 있다. 아버지와 형이 그의 재주를 몹시 사랑하여 15세 이전에 너무 일찍부터 명성이 나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이후로 내면(內面)의 학문에 더욱 주력하며 과거를 위한 학업에는 힘쓰지 않았다. 15, 16세에는 제가(諸家)의 학설을 두루 섭렵하여 노자(老子) · 석가(釋家)의 학문을 모두 탐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양(陰陽)의 수리(數理)에 대해서도 정통하였다. 그리하여 ‘팔진도(八陣圖)’를 연구하여 『기문둔갑법(奇門遁甲法)』을 지었는데, 대부분 자기의 의사에 따라 도표(圖表)를 작성하고 보충하여 여러 번 몸소 시험해 보기까지 하였다. 그의 저술인 『천도책(天道策)』은 ‘오묘한 천지조화를 기술한 비기(秘記)’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강학(講學)에 있어서도 공자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가르침에 따라서 가난한 농민과 천민의 아이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서 스스로 학문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다. 집 뒤에 서재(書齋)를 짓고 ‘통허재(洞虛齋)’란 편액(扁額)을 내걸고, 항상 단정히 앉아서 사람들에게 도(道)를 강론하였다.

1676년(숙종2) 삼산(三山)의 처갓집에 갔다가 역질(疫疾)에 걸려서 집으로 돌아와 병을 앓다가 죽었다. 죽을 때 생부(生父) 성호영에게 고하기를, “오늘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시켜 조부님께 여쭙고, 또 일가에 통보하여 제가 제때에 결별(訣別)을 고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아내에게 손을 내저어 밖으로 나가게 하고, “남자는 부인 곁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입니다.” 하였다. 그는 일어나서 꿇어앉아 시(詩) 한 구절을 외우고, 이어서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낭송하였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바로 내가 평생 좋아하던 글이고, 또 내 정신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글을 외우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면서 목숨도 같이 끊어졌는데, 1676년 11월 14일이고, 그때 나이가 겨우 23세였다.

저서로는 『통허재문집(洞虛齋文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헌징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외모가 빼어나고 슬기로워서 사람들이 ‘선골(仙骨)’이라 일컬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기상이 단아하였으며, 행동과 언어에 있어서 모든 것이 도(道)에 맞는 군자(君子)였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비록 나이가 어리거나 미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열고 성의를 다하여 반복해서 가르쳐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서 터득하도록 하였다. 집안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거느렸으므로, 비록 사납고 교활한 종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음을 고치고 행동을 바꾸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여 복종하고 그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

1654년(효종5) 2월 16일 상주(尙州)의 흥암리(興巖里)에서 태어났는데, 그날 밤 할아버지 성진승(成震昇)이 꿈속에 순임금[大舜]을 만나고 기이하게 여겨서, 아명(兒名)을 효순(孝舜)이라 지어서 불렀다. 그가 자라자, 할아버지의 명으로 큰아버지 성호정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소는 경상도 상주(尙州) 서쪽 하곡촌(霞谷村)의 언덕에 있고, 우암의 제자인 아버지가 부탁하여,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부인 상산박씨(商山朴氏)는 현감(縣監)박찬선(朴纘先)의 딸이다. 영조 때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상주의 죽림서원(竹林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통허재문집(洞虛齋文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귀록집(歸鹿集)』
  • 『근재집(近齋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