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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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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허록 |
한글표제 | 허록 |
한자표제 | 虛錄 |
상위어 | 환곡(還穀) |
관련어 | 번질(反作), 허류곡(虛留穀)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문용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허록(虛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3년 2월 14일, 『영조실록』 39년 4월 26일 |
환곡을 제대로 거두지 않았으면서도 허위로 거두었다고 기록하는 것.
개설
지방관이 문서에 허위로 기록하는 경우는 대체로 조세나 환곡을 제대로 걷지 못할 때 발생하였다. 정부에서 당장은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지만, 흉년이라든지 급한 일로 창고의 재원을 사용하려고 할 때면 창고에 재원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허위로 보유곡을 기록한 수령을 처벌하는 규정을 만들고 그 처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지방관의 허록(虛錄) 행위는 계속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환곡이 증가하면서 지방관의 허록 역시 환곡 부분에서 가장 많이 나타났으며, 처벌 규정 또한 환곡의 허록에 대한 것이 많았다. 실제로 환곡의 모순이 극대화되는 19세기 후반에는 전체 환곡의 절반 이상이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허류곡(虛留穀)이었다.
내용 및 특징
지방관은 조세의 징수와 환곡의 분급·징수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기한 내에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액을 징수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징수를 완결하였다고 보고한 뒤에 추가로 징수하여 완납하려고 하였다. 이런 현상은 1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조세를 납부하지 못한 세대에게 환곡을 주어서 납부하도록 하고는, 환곡을 나누어 줄 때에 그 액수를 환곡을 받아 간 액수에 추가하여 허위로 기록하였다가 가을에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런 운용상의 부정행위는 감사나 중앙정부에서 파악하기 힘들었다.
노비의 인원 파악, 속오군(束伍軍)보인(保人)이나 군액(軍額)의 파악도 규정된 액수를 채우는 일에 급급하여 거짓 기록이 많았다. 또한 군기(軍器)의 여러 물종을 거짓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직접 창고를 검사하기 전에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지방관이 교체될 때에는 창고를 조사하여 회계에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없는지를 면밀히 살피고 해유문서(解由文書)를 발급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13년 2월 14일).
17세기 중반 상평청에서 환곡을 운영하면서부터 전체적인 환곡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환곡 운영에서 지방관이 거두지 못한 곡식을 징수하였다고 기록하는 허록 행위가 빈번히 나타났다. 가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징수하였다고 보고하고 다음 해 봄에 곡식을 나누어 주지도 않고 곡식을 분급한 것으로 거짓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하는 행위를 번질(反作)이라고 하였다(『영조실록』 39년 4월 26일). 환곡 운영에서 허록과 번질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허록과 번질에 대한 처벌 규정은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거짓으로 기록한 지방관은 영원히 관직에 임용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5년간 관직에 임명을 금지하고 사면령이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두었다. 또한 허록한 지방관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 전임자의 부정행위를 적발하지 못하였으면 도배(徒配)의 형률을 시행하고 사면령이 있어도 용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환곡 운영에서 허록·번질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기 때문에, 세곡을 징수할 때에도 물을 타거나 부패하고 상한 것이 있는 경우에는 환곡을 허록한 규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변천
환곡은 흉년이 들거나, 환곡을 받은 사람이 사망 또는 도망하는 등의 이유로 징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정부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탕감(蕩減)해 주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허록한 부분은 장부상에는 징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탕감에 포함될 수 없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는 전반적인 환곡 액수가 줄어들었고, 환곡의 이자를 재정에 충당하는 비율이 증가하면서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탕감하는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虛留穀)이 급증했다.
허류곡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징수 유예를 인정한 구환(舊還)과 지방관의 허록 행위로 발생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구환은 이자를 징수하지 않지만 허록은 이자를 징수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1862년(철종 13) 전체 환곡 중에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은 약 55%였다. 그중 경상도 환곡은 93% 이상이 허록으로 인한 허류곡이었다. 이러한 환곡제의 모순은 1862년 임술 농민 항쟁이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수교집록(受敎輯錄)』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 오일주, 「조선 후기 재정 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실학사상연구』 3,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