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환(舊還)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구환 |
한글표제 | 구환 |
한자표제 | 舊還 |
관련어 | 정퇴(停退), 잉정(仍停), 미봉(未捧), 읍미봉(邑未捧)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고종 |
집필자 | 문용식 |
시행시기 | 숙종~고종 |
시행기관 | 비변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환(舊還) |
왕조 정부의 허락을 얻어 징수가 연기된 환곡.
개설
환곡은 기근이나 농민의 파산으로 인해 항상 징수하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었다.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였다. 17세기 후반에 환곡은 분급된 시기를 기준으로 당해 연도에 분급한 신환(新還)과 받아들이지 못한 묵은 환곡인 구환(舊還)으로 구분되었다. 구환은 독촉해도 거두어들일 가능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환곡을 적정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신환만이 아니라 구환도 일부를 징수하려고 노력하였고, 일부는 탕감하기도 하였다. 구환을 징수하기 위해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양을 기준으로 지방관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18세기 중엽까지 징수하지 못한 미봉곡은 아직 고질적인 폐단에 이르지는 않았다. 1776년(영조 52) 현재 전국의 미봉액은 1,290,000여 석으로 전체 환곡 액수의 약 15%의 미봉률을 기록하였다. 18세기 말에는 당해 연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정퇴(停退), 2년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체화하여 구별하였다.
19세기 전반에는 1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잉정(仍停), 3년 이상 징수하지 못한 것은 구환으로 세분하여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다. 이런 정퇴·잉정·구환은 왕조 정부에서 징수의 연기를 허가한 것이었으나, 마땅히 징수해야 할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읍미봉(邑未捧)이라 하였으며, 이는 구환에 포함되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구환에 대한 탕감이 종종 이루어졌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구환의 탕감을 억제하였다. 또한 19세기의 환곡 운영은 18세기와는 달리 미징수곡에 대한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왕조 정부에서 징수를 연기해 주는 구환의 액수를 감소시켰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명목상 환곡의 총액을 유지할 뿐 실제 각 지역에서는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다수 존재하였다. 또한 19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많은 양의 환곡이 진휼의 재원으로 소비되어 환곡은 감축되었다. 징수하지 못한 환곡은 증가하여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虛留穀)의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1862년(철종 13)의 환곡 상황은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이 환곡 총액의 절반을 넘어 54%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런 포흠곡을 무리하게 징수하려는 시도는 결국 농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환곡은 그 기능으로 인해 갚지 못하는 환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갚지 못한 환곡은 징수를 연기해 주거나 탕감해 주어야만 했다. 환곡은 분급된 시기를 기준으로 당해 연도에 분급한 신환과 받아들이지 못한 묵은 환곡인 구환으로 구분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당해 연도 환곡은 신환, 해마다 독촉해도 거두어들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구환으로 구분되었다. 환곡을 적정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환과 구환의 징수가 매우 중요하였다. 17세기 말까지도 구환과 신환의 환수 비율을 통하여 환곡의 총량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에는 미징수 곡물의 양과 농민들의 부담 능력도 고려되었다. 또한 미징수곡의 양을 기준으로 지방관을 처벌할 규정을 마련하여 징수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구환은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탕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 및 변천
1759년(영조 35)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여지도서』 환곡 항목에는 경기도 일부 지역의 미봉액수가 기재되어 있으며, 환곡을 징수하지 못한 시점이 4년 이내로 나타나 있다. 이는 이 시기까지 아직 고질적인 미봉의 폐단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전국적인 미봉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는 『곡부합록』으로, 1776년 현재 전국의 미봉액은 1,290,000여 석으로 약 15%의 미봉률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17세기 후반의 신환과 구환의 이분법적인 구분과는 달리 징수하지 못한 미봉을 정퇴·구환 등으로 세분하였다. 당해 연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부상에서 정퇴와 구환의 항목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퇴와 구환 규정을 다시 명확히 하고, 정퇴곡은 바로 그해에 분급한 환곡과 동일하게 징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규정은 19세기 전반의 『만기요람』에서 더욱 세분되었다. 1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잉정(仍停), 3년 이상 징수하지 못한 것은 구환으로 세분되어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다. 이런 정퇴·잉정·구환은 정부에서 징수를 연기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으나, 마땅히 징수해야 할 곡식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읍미봉이라 하였다. 읍미봉은 구환에 포함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에는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100만석 이상 항상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많으면 200만 여석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환곡의 총액을 1000만석으로 추정할 때 10∼20%에 해당하는 환곡이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으로 존재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많은 것은 빈번한 기근의 발생과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 보유 곡물로 무상 혹은 유상으로 식량을 나누어 주는 진휼정책을 실시한 결과였다. 진휼정책 이외에도 구환에 대해 주기적으로 탕감이 이루어졌으므로 양반과 관속 등의 세력가와 일반 민인들이 고의적으로 환곡 납부를 미루기도 하였다. 지방관의 부정행위도 미징수 환곡의 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100만석 이상의 걷지 못한 곡물이 늘 존재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액수는 거의 징수할 가능성이 없는 고질적인 포흠곡이었다.
이 수치는 비록 흉년 후에 대대적으로 구환을 탕감하였음에도 여전히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었다. 이처럼 흉년이 들면 당연히 징수해야 할 환곡을 징수하지 못하고, 또한 비축곡의 일부를 진휼의 재원으로 활용해야 했으므로 각 지역의 창고에 남아 있는 수량은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18세기 말에 이르러 환곡의 총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환의 징수를 강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19세기 들어서는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징수해야 할 구환을 징수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읍미봉으로 칭하고 구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구환의 징수를 강화하여, 구환의 범위를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제 징수하지 못한 구환을 왕조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이에 따라 19세기 들어 장부상의 구환 액수는 크게 감축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장부상의 액수였고, 실제로 징수하지 못한 구환은 18세기 후반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의 구환을 징수하려는 노력은 19세기 들어 강화되었다. 이에 짝하여 구환의 탕감도 18세기에 비하여 감축되었다. 이것은 재정에 충당되고 있던 환곡 총액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지만, 실제의 환곡 운영에서는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의 증가를 가져올 뿐이었다. 18세기에는 폭넓게 구환을 인정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여 환곡 총액이 감소하더라도, 현실적인 환곡 운영을 하려고 하였다. 반면, 19세기에는 구환의 범위를 제한하고 탕감을 적게 함으로써 환총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이는 고스란히 백성의 부담으로 귀결되어 환곡의 허류화 현상을 가속시켰으며, 폐단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776년에는 전체 환곡의 약 15%를 징수하지 못하였는데, 1862년에는 54% 이상을 징수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환곡의 실재 보유량은 장부상 액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포흠곡을 무리하게 징수하려는 시도는 백성들의 저항을 유발하였다. 1860년대 농민들의 저항이 발발한 데에는 19세기 환곡 운영의 모순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전반의 집중적인 자연재해로 인하여 환곡은 감소하고 징수하지 못한 포흠곡은 증가하였지만, 구환에 대한 탕감은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진휼을 목적으로 설치된 환곡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비용 조달을 위한 환곡도 일부가 감소하였다. 그러나 미징수 환곡을 제대로 징수할 수 없으면서도 탕감을 하지 않고 징수하려 한 정책은 환곡을 수탈의 도구로 변화시켰고, 결국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의의
환곡 운영 과정에서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으로 규정하고 때때로 탕감한 것은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주고 체제 안정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환곡을 일정량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곡의 일부를 징수해야 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구환의 규정을 세밀히 하여 구환에 포함되는 환곡을 억제하려 하였고, 구환에 탕감도 줄었다. 이로 인해 환곡의 재정 기능은 강화되고 있었으나,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이 급증하여 환곡 폐단을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목민심서(牧民心書)』
- 『사정고(四政考)』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 문용식, 「19세기 전반 환곡 진휼기능의 변화과정」, 『부산사학』 19, 1990.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 1989.
- 오일주, 「조선후기의 재정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실학사상연구』 3 , 1992.
-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오일주, 「조선후기 국가재정과 환곡의 부세적 기능의 강화」,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