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부(冢婦)"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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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장자(長子)의 처, 즉 맏며느리.

개설

총부(冢婦)는 적부(嫡婦)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종부(宗婦)라는 용어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총부는 대종(大宗)이냐 소종(小宗)이냐에 상관없이 한 집안의 맏며느리를 뜻하지만, 종부는 대종의 집안일 때만 사용되는 명칭이다. 따라서 총부가 보다 넓은 의미의 용어이고 종부는 총부에 속하는 부분 집합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예기』에 나타나 있는 총부의 역할은 우선 제사를 받들고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일이다.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모든 일을 의논해서 시행해야 하는 제약이 있지만, 대개는 가사를 대표적으로 책임진다. 특히 총부 자신을 제외한 여타의 며느리들 즉 개부(介婦)에 대해서는 독점적인 지휘권을 갖는다. 다른 며느리들은 어떤 사안이 생겼을 때 시어머니에게 직접 묻는 것이 아니라 총부에게 묻도록 되어 있다. 또한 다른 며느리들은 총부와 대적할 수 없었다. 즉 개부들은 총부와 나란히 걸어서도 안 되고, 윗사람으로부터 명령을 똑같이 받아서도 안 될 뿐 아니라 총부와 나란히 앉아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총부의 위치는 다른 며느리들에 비하여 높은 것이었으며, 그 지위는 바로 종법(宗法)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었다. 본래 종법에 의하면 총부는 종자인 남편이 먼저 죽으면 그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총부의 위치가 남편에 의해서만 규정되지는 않았다. 중국과 달리 조선의 총부는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본래 총부는 종자인 남편이 먼저 죽고 나면 더 이상 총부의 역할은 없으며, 제사는 당연히 새로운 종자에게 돌아간다. 총부의 권한은 제사를 담당하는 종자의 부인으로서 제사를 준비하는 것에 한정되며, 제사의 주관이나 제사의 상속에는 미치지 않는다.

1554년(명종 9) 9월 조정에서는 총부에 대해 논의했다. “신등(臣等)이 예문(禮文)을 고찰해 보니 주제자라고 하는 것은 주인(主人)을 일컫는 것이고 주인의 처는 주부(主婦)를 일컫는 것이니 주부는 곧 총부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그 여자를 총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중국에는 대종의 법이 있어서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는 부인은 제사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국의 총부란 제사를 주관하는 주인의 처를 의미한다(『명종실록』 9년 9월 27일). 그런데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더 이상은 총부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총부가 남편의 위치에 따른 종속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총부는 남편이 없이도 총부의 위치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권한을 갖기도 했다. 1492년(성종 23) 정양군(定陽君)이순(李淳)은 형수인 오산군(烏山君)이주(李澍)의 처 성씨(成氏)의 제사를 가져온 문제로 주위의 비난을 샀다. 형에게 아들이 없기는 했지만 형수가 총부로서 제사를 주관할 수도 있는데, 형의 상기(喪期)가 끝나기도 전에 제사를 빼앗아 왔다는 것이다(『성종실록』 23년 7월 28일). 이는 총부는 비록 아들이 없더라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선대(先代)의 제사를 받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앞서 중국의 총부가 장자의 처로서 장자 생존 시에만 종사를 받드는 역할인 것과는 대비된다.

중국에는 대종의 법이 있어서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는 부인은 제사를 주관할 수 없으나 조선은 대종의 법이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여서 장자의 처가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더라도 봉사할 집에 들어가 선대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오랫동안 유지돼 왔다. 이른바 총부주사(冢婦主祀)의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조선의 총부는 남편이 종자로서 제사를 받들다가 죽었을 때 이어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이 제사를 이어받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죽었더라도 후에 총부로서 제사를 받드는 경우가 있다. 조선에서 총부는 심지어 기본적으로 남편이 먼저 죽은 경우의 맏며느리라는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다.

1553년(명종 8) 10월 사헌부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세간의 이른바 총부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후 장자가 제사를 받들다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그 처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 장자가 먼저 죽었으나 그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후에 이미 죽은 장자의 처로서 제사를 받들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에서는 총부를 우선 남편이 없는 맏며느리로 보고 그것을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하나는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후 장자가 제사를 지내다가 죽은 경우, 또 하나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장자의 처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맡는 경우이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일찍이 봉사해 온 경우에는 그 처를 총부라고 하여 죽을 때까지 그대로 봉사하게 하는 것이 국법이지만, 미처 봉사하지 못하던 장자의 처는 총부로서의 권한을 누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즉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총부의 의미에서 후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차자(次子)에게 제사를 양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장자가 비록 제사를 받들지 않던 상태에서 죽었더라도 그 장자의 처를 총부로 간주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해당 조에서는 장자로서 봉사하지 않다가 죽은 경우에는 그 처를 총부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고례(古禮)를 참고해 보면 과연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습속은 장자의 처가 총부로 되는 것이 오래되었습니다.”라는 의견이다. 제사를 받들지 않던 장자의 처는 총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과 그대로 총부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의견 대립은 팽팽했다. 그런데 이후 총부와 관련된 소송이나 논쟁에서는 제사를 받들지 않던 장자의 처도 총부로 보는 의견이 더 유력해진다.

1551년(명종 6) 무산군(茂山君) 집안의 제사상속 분쟁은 제사를 받들지 않다가 죽은 장자의 처를 총부로 인정해 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산군 부인 신씨(申氏)는 큰아들인 귀수(龜壽)가 자식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미수(眉壽)가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런데 후에 귀수의 부인 안씨가 귀수의 또 다른 동생인 석수(碩壽)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여 남편 제사와 선대 봉사를 맡게 하고자 나섰다.

이미 둘째 아들에 의해 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부는 새롭게 입후를 하고 아울러 선대 제사를 돌려받고자 한 것이다. 이 경우 총부와 새로 입후된 자에게 봉사권을 넘긴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이전의 사항을 번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귀수의 처 안씨를 총부로 인정하고자 했다. 당시 왕은 “대간들이 총부의 법은 훼손하기가 편치 않다고 여러 달 논집(論執)하였기 때문에 총부의 법은 부득이 좇아야 할 것이다.”라며 총부 입장을 옹호해 주고 있다.

조선의 총부는 맏며느리로서 제사를 받드는 정도가 아니라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은 후에 자신이 제사를 맡아 총부주사를 하고 또 양자를 들여 자신의 계통이 계속 권한을 갖게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에서는 남편이 자식 없이 죽고 난 후 그 처를 총부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일반적인 총부 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총부권은 중국에서는 불가능한 조선만의 독특한 관습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왜 이러한 총부 개념이 더 일반적이었을까? 우선 ‘대종의 법이 행해지지 않아서’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즉 중국과 같은 종법이 완전하게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부 자신의 노력이다. 총부는 제사와 관련한 자신의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입후 문제에 신경을 썼다.

만일 총부가 제사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차자에게 넘길 경우 총부는 가묘가 있는 집과 제사 관련 재산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 총부는 종가로부터 쫓겨나 거리에서 우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총부들에게 입후는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따라서 총부는 제사상속에 따른 여러 가지 경제권을 잃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입후를 하고 또 입후권자로의 권리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른바 총부의 입후권과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형망제급이란 장자가 아들 없이 죽었을 때 차자가 승중(承重)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종법에서 자연스러운 상속법 중의 하나이다. 조선의 『경국대전』 봉사조에도 “적장자에게 아들이 없으면 중자(衆子)가, 중자도 무후(無後)할 경우에는 첩자가 봉사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조선중기의 현실에서 비록 장자가 아들 없이 죽은 경우라도 그 처, 즉 총부가 살아 있으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 4월 여희령(呂希寧) 집안 여문망(呂文望)의 과거 응시 문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여문망은 여희령의 둘째 아들인 여중온(呂仲溫)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장자 여맹온(呂孟溫)이 아들 없이 죽었고 둘째 여중온도 또한 죽고 없었다. 그래서 여희령의 처가 죽자 여문망이 자신이 당연히 할머니 제사를 주관하고 제사를 이어야 한다고 나섰다(『명종실록』 7년 4월 2일).

그런데 여맹온의 처가 말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총부이니 봉사하는 일은 당연히 내 손에서 나와야 한다. 남편의 셋째 동생의 아들 의남(義男)으로 제사를 잇게 할 것이니 너는 상을 주관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때 여문망은 자신은 상을 주관해야 하기 때문에 당시에 치러지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부의 입후에 의해 자신이 주관자의 임무를 벗게 되자 과거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국가에 건의를 하게 되었다.

이 경우 총부는 시동생의 아들이 조모상을 주관하는 이른바 형망제급에 이의를 제기하고 스스로 다른 시동생의 아들을 세워 제사를 상속하고자 한 것이다. 대표적인 총부와 형망제급의 갈등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적극적으로 총부의 권한을 옹호해 주었다. “우리나라 총부의 법은 사세상 고치기 곤란합니다. 입후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총부가 뜻대로 하게 하여 그 권한을 중하게 합니다. 문망에게 조모상을 입지 말게 해서 우리나라 총부의 권한을 중하게 하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조정의 의논 결과가 ‘우리나라는 총부권이 강력해서 쉽게 고칠 수 없다.’는 데에 대부분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총부들은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한 먼 친척에서 양자를 데려오고자 했다. 조정에서는 “무식한 과부들이 망부(亡夫)의 본의는 생각하지 않고 응당 봉사할 자가 있어도 한결같이 ‘입후하게 할 수 있다’는 설에 따라 친아우의 아들을 버리고 법외의 먼 족속을 후사로 삼기를 도모합니다.”라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총부의 지위를 보장하는 노력은 결과적으로는 종법 원칙에도 적절하게 맞아 들어갔다는 점이다. 즉 종법에 형망제급의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종의 적장자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세워 제사를 잇게 하는 것이 하나의 법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총부권의 보장은 종법의 보편화 노력과 궤를 같이했다고 할 수 있다. 총부권은 조선의 종법이 정착하는 데 일조했다.

변천

조선후기가 되면 총부의 권한은 약화된다. 입후를 하는 데 있어서 총부의 영향력보다는 종중 혹은 종회의 의결권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총부권은 종법의 보편화에 일조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 보편화로 인해 권한이 축소되었다. 사실상 총부권은 종중이 발달하기 전인 조선중기까지 가장 강력했다고 할 수 있다.

의의

총부나 총부권을 통하여 조선 사회에서 종법이 정착해 가는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총부는 중국과 달리 비교적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사를 주관하고 강력한 입후권을 행사하였는데, 이는 종법의 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총부들은 장자의 처라는 점에서 조선 종법의 보편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었다.

참고문헌

  • 『예기(禮記)』
  • 김성숙, 「이조 초기의 제사상속 법리와 총부법」, 『숭전대학교 논문집』15, 1985.
  • 김윤정, 「조선 중기 제사승계와 형망제급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20, 2002.
  • 이순구, 「조선 중기 총부권과 입후의 강화」, 『고문서연구』9·1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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