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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2 기준 최신판



조선초기 평안도와 함길도 일부 지역에 사신을 접대하고 마필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우역촌.

개설

조선초기에 역참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방어하기 위하여 4군 6진을 설치하였다. 합배(合排)는 이 지역의 군현 읍치(邑治)와 관방(官房)인 진보(鎭堡)·구자(口子)에 왕래하는 사신들을 접대하고 마필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임시적 성격의 우역촌(郵驛村)으로써 체마소(遞馬所)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합배에는 주로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찰방(察訪)을 파견하여 대략 27개 가량의 합배를 순행하면서 고찰하게 하였다. 합배는 고유한 업무인 사신 접대 외에도 부방(赴防) 등 국방의 업무도 담당하였다. 이러한 합배는 세조대의 역로(驛路) 개편을 거쳐, 성종대에 반포된 『경국대전』에 평안도 지역의 합배들은 찰방도인 어천도(魚川道)대동도(大同道)의 속역으로 규정되었다.

이와 같이 합배는 평안도 지역에 역참 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사신의 왕래에 따른 마필 제공을 위해 주로 압록강~두만강 연변에 설치된 임시적 성격의 우역(郵驛)이었다.

내용 및 특징

합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21년(세종 3)에 함길도 단천(端川)의 기원역(碁原驛)시리역(施利驛) 사이가 너무 멀고 또 험준한 마운령(磨雲嶺)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인마(人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마운령 아래에 있는 옛 관터에 합배를 설치하고 부근의 민호(民戶)를 소속시킨 데서 찾을 수 있다(『세종실록』 3년 2월 7일). 기존의 기원역과 시리역 사이에 있는 마운령 아래 옛 관터에 역과 다른 별도의 합배를 설치하고 부근의 민호 15호를 소속시켜 오가는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홍원(洪原)의 평포역(平浦驛)역리(驛吏)가 부족하기 때문에 합배를 설치하여 돕도록 하였다. 여기서 합배는 역과 역 사이가 멀거나 역리가 부족한 곳에 설치하여 역역(驛役)을 돕는 역촌(驛村)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합배는 개천(价川)에서 강계(江界)까지 9개의 합배 또는 여연(閭延)·태천(泰川)·벽동(碧潼)·이산(理山)·운산(雲山) 등지에 27개의 합배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귀주합배(龜州合排), 종포합배(從浦合排), 상토합배(上土合排), 장동합배(長洞合排), 박시리합배(博時里合排)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합배는 주로 체마소에 설치되었는데 사신이 역마를 갈아타는 곳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 같다(『세조실록』 4년 12월 12일). 합배는 『경국대전』 시기에 역명으로 교체되었는데, 이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일부 군현의 체마소 설치와 역명 개칭 실태를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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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삭주도호부에 설치된 소삭주관사체마소(또는 합배)는 소삭주역으로 바뀌었고, 영변대도호부의 개평체마소 역시 개평역으로, 희천군의 적유합배는 적여역으로, 단천군의 신합배역은 곡구참으로, 위원군에 설치된 상북동합배와 하북동합배는 북동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자성군의 마전동·금창동합배는 『경국대전』어천도(魚川道) 속역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합배는 무략(武略)을 겸비한 찰방을 임명하여 순행·고찰하게 하였다. 합배의 중요 역할은 유사시에 도절제사와 함께 변방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평상시에는 사신 접대와 역마 제공 그리고 공문서 전송을 담당하였다.

합배의 편성은 부근의 민호에서 평민 15호를 차정(差定)하여 입역(入役)케 하였으며(『세종실록』 25년 4월 14일), 소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공수전(公須田)을 지급하거나 군자(軍資)에서 지원하였다(『예종실록』 1년 윤2월 24일). 그리고 합배에 필요한 마필은 근처에 있는 목장마 50필을 지급하여 역마로 비치하였다(『세종실록』 29년 3월 28일).

변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원래 평안도에는 평안관로찰방(平安館路察訪)이 임명되어 생양관(生陽館)[중화], 대동관(大同館)[평양], 안정관(安定館)[순안(順安)], 숙녕관(肅寧館)[숙천(肅川)], 안흥관(安興館)[안주(安州)], 가평관(嘉平館)[가산(嘉山)], 신안관(新安館)[수천(隨川)], 운흥관(雲興館)[곽산(郭山)], 임반관(林畔館)[선천(宣川)], 거연관(車輦館)[철산(鐵山)], 양책관(良策館)[인산(麟山)], 소관관(所串館)[정녕(定寧)], 의순관(義順館)[의주(義州)]이 설치되고 압록강~두만강 연변에는 역참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4군 6진의 설치 이후 이 지역의 군현과 진보(鎭堡) 간에 왕래하는 사신 접대나 공문서의 전달을 위해서 임시 성격의 합배 또는 체마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배는 세조 때 몇 차례 역로 개편을 거쳐 성종대에 이르면 『경국대전』 체제하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확립됨으로써 소멸되고, 그 대신 역참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 평안도의 역참은 대동도(大同道)어천도(魚川道)가 총괄하도록 규정되면서 4군 지역에는 어천도 산하에 소고역(所古驛)[개천(价川)], 개평역(開平驛)[영변(寧邊)], 장동역(長洞驛)[희천(熙川)], 평전역(平田驛)[희천(熙川)], 가막역(加莫驛)[영원(永遠)], 적여역(狄餘驛)[희천(熙川)], 입석역(立石驛)[강계(江界)], 성간역(城干驛)[강계(江界)], 종포역(從浦驛)[강계(江界)], 만포역(滿浦驛)[만포(滿浦)], 북동역(北洞驛)[위원(渭原)], 앙토역(央土驛)[이산(理山)], 고리역(古理驛)[이산(理山)], 우장역(牛場驛)[이산(理山)], 고연역(古延驛)[운산(雲山)], 벽단역(碧團驛)[벽동(碧潼)], 창주역(昌州驛)[창성(昌城)], 대삭역(大朔驛)[삭주(朔州)], 소삭역(小朔驛)[삭주(朔州)], 방산역(方山驛)[의주(義州)], 초천역(草川驛)[양덕(陽德)]이 설치되었다. 아마도 어천도 속역의 명칭이 4군 설치 시기의 합배 또는 체마소 명칭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반면에 함경도는 고산도(高山道), 거산도(居山道), 수성도(輸城道)로 개편되어 고산도에는 남산(南山)[안변(安邊)], 삭안(朔安)[안변(安邊)], 화등(火燈)[안변(安邊)], 봉용(奉龍)[안변(安邊)], 철관(鐵關)[덕원(德源)], 양기(良驥)[문천(文川)], 통달(通達)[고원(高原)], 애수(隘守)[고원(高原)], 화원(和原)[영흥(永興)], 주천(酒泉)[정평(定平)], 봉대(蓬臺)[정평(定平)], 평원(平原)[함흥(咸興)], 덕산(德山)[함흥(咸興)] 등의 속역(屬驛)이, 거산도에는 함원(咸原)[홍원(洪原)], 신은(新恩)[홍원(洪原)], 평포(平浦)[홍원(洪原)], 오천(五川)[북청(北靑)], 제인(濟人)[북청(北靑)], 시리(施利)[이성(利城)], 곡구(谷口)[이성(利城)], 기원(基原)[단천(端川)], 마곡(麻谷)[단천(端川)], 영동(嶺東)[길성(吉城)], 임명(臨溟)[길성(吉城)], 웅평(雄平)[길성(吉城)], 명원(明原)[명천(明川)], 고참(古站)[명천(明川)], 종포(終浦)[갑산(甲山)], 웅이(熊耳)[갑산(甲山)], 허천(虛川)[갑산(甲山)], 적생(積生)[삼수(三水)], 그리고 수성도에는 오촌(吾村)[경성(鏡城)], 주촌(朱村)[경성(鏡城)], 요참(要站)[경성(鏡城)], 석보(石堡)[부녕(富寧)], 양수(懹綏)[부녕(富寧)], 영안(寧安)[회녕(會寧)], 풍산(豊山)[회녕(會寧)], 역산(櫟山)[회녕(會寧)], 종경(鍾慶)[종성(鍾城)], 무안(撫安)[종성(鍾城)], 녹야(鹿野)[종성(鍾城)], 무녕(撫寧)[온성(穩城)], 덕명(德明)[온성(穩城)], 마유(馬乳)[경원(慶原)], 연기(燕基)[경원(慶原)], 아산(阿山)[경원(慶原)], 강양(江陽)[경흥(慶興)], 웅무(雄撫)[경흥(慶興)] 등의 역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압록강~두만강변의 합배 설치는 주로 조선초기에 국한되어 임시로 역촌으로써 설치·운영되다가 역참 제도로 흡수·통합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와는 별도의 체마소가 설립되었는데 주로 왕의 왕릉 참배에 따른 마필 교체를 위해 설치·운영되었다. 예를 들면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는 1711년(숙종 37) 8월 19일의 관왕묘체마소(關王廟遞馬所), 1728년(영조 4) 9월 1일의 청파체마소(靑坡遞馬所), 그리고 1729년 8월 16일의 영은문체마소(迎恩門遞馬所) 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합배는 평안·함경도의 압록강~두만강 국경 연변에 설치된 군사적 성격이 짙은 우역촌으로써 변방 방어와 군사 정보 전달 및 사신들에게 역마 제공을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성종 이후 역참 제도의 확립으로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조병로, 『한국 근세 역제사(驛制史) 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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