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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희방에 있던 이성계의 사저를 사찰로 개조한 곳으로, 세종대 선교양종의 교종도회소였던 절.

개설

흥덕사(興德寺)는 서울 연희동 일대인 연희방(延禧坊)에 위치했던 사찰로, 1401년(태종 1) 태상왕이던 태조가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며 사저를 희사하여 창건하였다.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이 이곳에서 편찬되었다. 세종대에 여러 불교 종파들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하면서 교종을 관할하는 도회소를 흥덕사에 두었다. 연산군 말년에 선종도회소 흥천사(興天寺)와 함께 폐사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세종대인 1424년(세종 6) 불교의 각 종파들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하면서 기존의 교단 관리 관서였던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양종 도회소를 설치하였다. 교종도회소는 흥덕사, 선종도회소는 흥천사에 두었고 소속 승려의 신분증명서인 도첩(度牒) 발급과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僧科) 시행, 공식 사찰의 주지 임명 등을 관할하였다. 당시 교종 소속으로 18개 사찰이 공인되어 승려와 사원 전지의 수가 지정되었다. 연산군 말년에 흥덕사와 흥천사를 훼철하면서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는 과천청계사(淸溪寺)로 옮겨졌고 승과 시행 또한 중단되었다. 중종대인 16세기 초반 선교양종과 도회소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경국대전』의 도승(度僧) 항목이 삭제되었다. 이후 명종대인 1550년(명종 5)부터 1565년 사이에 선교양종이 재건되었지만 도회소 명칭은 더 이상 쓰지 않았고 교종 본사는 봉선사(奉先寺), 선종 본사는 봉은사(奉恩寺)로 정해졌다.

변천

흥덕사는 태조가 사저를 희사하여 창건한 절로 태종대에도 참경(懺經) 법석이 열렸고 태조가 세상을 뜨자 흥덕사 주지 설오(雪悟)를 강주(講主)로 하여 108명의 승려가 빈전에서 화엄삼매참법석(華嚴三昧懺法席)을 거행하였다(『태종실록』 8년 5월 25일) (『태종실록』 8년 8월 17일). 이어 흥덕사에서 태조의 백일재가 설해졌고, 기신재 때는 태종이 직접 참석하여 600권 『반야경(般若經)』을 독경하게 하였다(『태종실록』 8년 9월 5일) (『태종실록』 10년 5월 19일). 태조와 태종의 모후 신의(神懿)왕후의 기신재가 흥덕사에서 열렸으며 세자와 공신, 고위 관료들이 일제히 참여하였다(『태종실록』 11년 5월 23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흥덕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때 교단을 관리하는 관서인 승록사가 폐지되면서 서울의 흥천사와 흥덕사가 선교양종의 도회소로 지정되었다. 양종에 속한 36사에는 각기 150~500결의 토지가 지급되었고 2결당 1명에 해당하는 수의 승려가 배정되어 양종의 공인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도합 3,750명이었다. 또 공인된 사사전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총 7,900여 결이었다.

당시 교종도회소인 흥덕사는 사사전 250결에 거주 승려 120명으로 정해졌고 선종 도회소 흥천사에는 보유하고 있던 사사전 160결에 추가로 90결이 지급되고 거주 승려는 120명으로 제한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때 승록사를 혁파하면서 그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384명을 교종과 선종의 도회소에 나누어 주었다(『세종실록』 6년 4월 12일). 이후 양종의 도회소인 흥덕사와 흥천사는 특별히 정기적으로 수리하도록 하였고 이졸(吏卒)이나 잡인의 출입을 금하였다(『세종실록』 21년 4월 12일) (『세종실록』 21년 4월 20일). 당시 선교양종의 공인 사찰이 된 36사 중 20여 개 이상이 원당, 능침사, 수륙사 등 왕실 관련 사찰이었고 그 중 상당수가 서울 및 경기도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흥덕사를 덕흥사(德興寺)로 표기한 곳도 있는데(『세종실록』 6년 3월 1일), 이는 흥덕사의 오기(誤記)이다.

성종초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도승법과 선교양종, 승과에 관한 규정이 명시되었고 이는 불교에 대한 법제적 공인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연산군대에 교종과 선종의 도회소가 청계사로 이전되었고 정기적으로 시행되던 승과도 더 이상 거행되지 않게 되었다. 중종대인 1512년(중종 7) 선교양종 및 양종 도회소가 폐지되었고 1516년에는 『경국대전』의 불교 관련 조항이 삭제되어 법제적 폐불 상황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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