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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서봉사|한글표제=서봉사|한자표제=瑞峰寺|대역어=|상위어=자복사(資福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종린(宗璘), 천태종(天台宗), 자복사찰(資福寺刹), 서봉사지(瑞峰寺址),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시대=고려~조선|왕대=|집필자=윤기엽|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3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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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서봉사|한글표제=서봉사|한자표제=瑞峰寺|대역어=|상위어=교종(敎宗), 총남종(摠南宗), 삼십육사(三十六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자복사(資福寺), 정양사(正陽寺)|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전라남도 담양군|시대=조선전기|왕대=|집필자=김용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6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3027_001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05012_003 『세종실록』 7년 5월 12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광교산에 있었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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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절.
  
 
=='''개설'''==
 
=='''개설'''==
  
서봉사(瑞峰寺)의 창건 시기는 전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인 12세기에 현오(玄悟) 국사(國師) 종린(宗璘)이 주석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 천태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19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서봉사지(瑞峰寺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있고, 2013년부터 용인시가 학술 발굴 조사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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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위치한 서봉사(瑞峰寺)의 창건 및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태종대에 242개 사찰을 공인할 새로 선정된 88개의 명찰 중 하나였고 총남종에 소속되었다. 세종대 선교양종 36개 사찰을 지정할 때 교종 18개사의 하나로 편입되었다가 몇 년 후 누락되고 금강산[[정양사(正陽寺)]]가 대신 들어갔다.
  
=='''내용 및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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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1)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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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대에 억불 정책이 가시화되었는데, 1406년(태종 6) 11개 종파의 242개 공인 사찰을 제외한 전국 사찰의 [[전민(田民)]]이 속공되었다. 당시 지정된 242개 사찰을 종파별로 보면,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쳐서 70사, 천태종 계열인 [[소자종(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은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은 모두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은 합쳐서 30사, [[남산종(南山宗)]]과 [[시흥종(始興宗)]]은 각각 10개 사찰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3027_001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고려 때 현오 국사 종린이 주석하면서 국왕을 강학(講學)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고려후기에 세워진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 등을 볼 때 고려시대의 절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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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에는 242개 사찰을 정할 때 유서 깊은 대가람이 누락되고 이미 없어진 사찰에 주지가 임명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하여, 산수 경치가 좋은 사찰을 대신 선정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명산의 대찰 88개를 새로 선정해 주로 읍내에 있는 고려 이래의 [[자복사(資福寺)]]를 대체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는 고려시대에 나라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각 지역의 중심지에 설치했던 비보사(裨補寺)로서, 위의 조치는 조선의 지역 질서 개편과 연동하여 고려의 유산을 혁파하고 산간에 있는 명찰로 대체한 것이다. 또한 11개 종파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의 7개로 축소 또는 통합되었다. 당시 창평 서봉사는 총남종 소속 사찰로서 새로 지정된 88개 사찰에 포함되었다.
  
(2)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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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서봉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서봉사는 교종 18사에 포함되었고 원래 보유 전지 60결에 더하여 9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150결의 소유가 허용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정해졌다. 같은 전라도의 전주[[경복사(景福寺)]]는 원속전 100결에 50결이 더해졌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서봉사와 같은 규모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용구(龍駒: 현 경기도 용인) 서봉사가 천태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서봉사는 천태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된 사찰이었으므로, 당시 서봉사가 용구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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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년 후 선종에 소속된 전라도 태인의 [[흥룡사(興龍寺)]]와 교종의 서봉사는 산수가 좋은 명찰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원도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와 정양사로 각각 대체되었고, 흥룡사와 서봉사의 전지를 모두 옮기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05012_003 『세종실록』 7년 5월 12일]). 이로써 서봉사는 국가가 공인한 36개 사찰에서 제외되었고 이후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현존하는 사찰로 명기된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반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폐사된 절로 명기된 것으로 보아 19세기경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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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서봉사의 터만 남아 있다.
 
 
(3) 현대
 
 
 
현재는 절터만 전하는데, 서봉사 터는 자연 경사면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6단의 석축 계단을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한 산지가람 형태이다. 절터의 전체 남북 길이는 130m, 동서 폭은 90m이다.
 
 
 
2009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사역 지표 조사를 통해 서봉사지가 크게 중원, 동원, 서원의 세 영역으로 나눠진 것을 확인했으며, 수원시는 이를 바탕으로 2012년 종합 정비 계획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2013년 용인시가 한백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서봉사지에 대한 1차 학술 발굴 조사를 한 결과, 현오국사탑비가 있는 중원에서 확인된 금당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동서 14.8m~16.5m, 남북 10.5m~10.7m 크기로, 처음 지은 뒤 크게 3차례에 걸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건물은 기단과 초석 및 적심 그리고 초석 사이에 조성된 하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당지 서쪽편에서도 건물지 2동이 일부 확인되었으며, 이 건물지의 북편에 축대가 시설되어 있었다. 금당지 내부와 기단 주변에서는 막새기와를 비롯해 다량의 평기와가 출토되었다.
 
 
 
=='''문화재'''==
 
 
 
서봉사 현오국사탑비(瑞峰寺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는 1185년(고려 명종 1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이지명이 지었고 글씨는 유공권이 썼다. 높이 1.88m, 너비 0.97m인 점판암의 탑신이 화강암의 부석(趺石) 위에 있으며 이수(螭首)는 없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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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범우고(梵宇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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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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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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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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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7 판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절.

개설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위치한 서봉사(瑞峰寺)의 창건 및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태종대에 242개 사찰을 공인할 때 새로 선정된 88개의 명찰 중 하나였고 총남종에 소속되었다. 세종대 선교양종 36개 사찰을 지정할 때 교종 18개사의 하나로 편입되었다가 몇 년 후 누락되고 금강산정양사(正陽寺)가 대신 들어갔다.

변천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대에 억불 정책이 가시화되었는데, 1406년(태종 6) 11개 종파의 242개 공인 사찰을 제외한 전국 사찰의 전민(田民)이 속공되었다. 당시 지정된 242개 사찰을 종파별로 보면,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을 합쳐서 70사, 천태종 계열인 소자종(疏字宗)법사종(法事宗)은 43사, 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은 모두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은 합쳐서 30사, 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은 각각 10개 사찰이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다음 해에는 242개 사찰을 정할 때 유서 깊은 대가람이 누락되고 이미 없어진 사찰에 주지가 임명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하여, 산수 경치가 좋은 사찰을 대신 선정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명산의 대찰 88개를 새로 선정해 주로 읍내에 있는 고려 이래의 자복사(資福寺)를 대체하게 하였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는 고려시대에 나라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각 지역의 중심지에 설치했던 비보사(裨補寺)로서, 위의 조치는 조선의 지역 질서 개편과 연동하여 고려의 유산을 혁파하고 산간에 있는 명찰로 대체한 것이다. 또한 11개 종파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의 7개로 축소 또는 통합되었다. 당시 창평 서봉사는 총남종 소속 사찰로서 새로 지정된 88개 사찰에 포함되었다.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서봉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서봉사는 교종 18사에 포함되었고 원래 보유 전지 60결에 더하여 9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150결의 소유가 허용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정해졌다. 같은 전라도의 전주경복사(景福寺)는 원속전 100결에 50결이 더해졌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서봉사와 같은 규모였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하지만 몇 년 후 선종에 소속된 전라도 태인의 흥룡사(興龍寺)와 교종의 서봉사는 산수가 좋은 명찰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원도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와 정양사로 각각 대체되었고, 흥룡사와 서봉사의 전지를 모두 옮기게 하였다(『세종실록』 7년 5월 12일). 이로써 서봉사는 국가가 공인한 36개 사찰에서 제외되었고 이후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서봉사의 터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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