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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서학|한글표제=서학|한자표제=西學|대역어=|상위어=사부유학(四部儒學), 사학(四學)|하위어=|동의어=서부유학(西部儒學)|관련어=남학(南學), 동학(東學), 미륵사(彌勒寺), 북학(北學), 중학(中學)|분야=교육·출판/교육기관/사부학당|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조준호|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예조(禮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78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11년 1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25_001 『연산군일기』 11년 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11030_007 『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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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성부 서부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립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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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래 중국과 조선에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과 사상.
  
 
=='''개설'''==
 
=='''개설'''==
  
서학은 예조 속아문인 사학(四學)의 하나로, 서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다. 서학에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재학생 중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서 성균관에 올려 교육하게 하였다. 조선전기부터 교육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고강(考講)]]이나 [[제술(製述)]] 등의 시험 제도가 운영되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명무실한 채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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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西學)은 사상적 측면에서 서양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 신학을 기초로 한 기독교 사상을 뜻한다. 조선은 17세기 이후 중국을 왕래하던 사행을 통해서 서학 서적을 수입했고 서학을 전수받았다. 당시 서학적 과학 기술은 조선에서 천문학과 지리학 등의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나, 사변적 문화 풍토가 강했던 조선에서는 서학의 과학 기술적 측면보다는 사상적 측면에 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서학은 신문화 수용 운동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지식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여 유행처럼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서학의 사상적 측면인 천주교 신앙은 18세기 말엽 이래 성리학과 충돌을 일으켰고, 이에 사학(邪學)·사설(邪說)로 규정되어 지배층으로부터 엄격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도 서학 신봉자들은 이를 적극 수용하고 재해석해서 조선서학(朝鮮西學)을 성립시켜 나갔다.
  
=='''설립 경위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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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서학이라는 용어가 과학 기술 천주교 신앙과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초창기 조선 정부는 서학을 탄압하면서 과학 기술과 사상을 구별하여 그 사상은 배격하되 과학 기술은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곧 서양의 과학 기술까지 억압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사상으로서의 서학은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민중 종교 운동으로 전환되어 갔고, 과학 기술적 측면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서학은 평등한 인간관을 제공해 주었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자각을 새롭게 강화시켜 나갔다.
  
서학(西學)의 전신은 고려 말에 설치된 서부유학(西部儒學)이다. 조선전기에는 이를 계승해서 운영하였으나, 독립된 공간을 갖지 못하여 사찰인 미륵사(彌勒寺)를 빌려서 사용하였다[『정종실록』 2년 8월 21일]. 이후 1411년(태종 11) 남학(南學)의 건립을 시작으로 동학(東學), 중학(中學), 서학도 독립된 학사가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학은 미륵사에서 [[자은종(慈恩宗)]] 경고(京庫)로 이전되었고, 다시 1435년(세종 17) 11월 이곳이 한성부 북부의 구석에 위치하여 유생들의 왕복이 불편하다는 지적에 따라 서부 여경방(餘慶坊: 현재 서울 종로구 세종로나 신문로 일대)에 학사를 건립한 후 이전하였다[『세종실록』 17년 11월 1일].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으로 사부유학을 사학으로 개칭할 때 서부유학은 서학으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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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학의 성립'''==
  
=='''조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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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부터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주로 예수회에 소속되었다. 그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일종의 제왕학으로 존중받던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기술을 먼저 중국에 전파했다. 그들은 중국 역법(曆法)의 개량에 기여했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파함으로서 서양 수학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전했다. 현지 문화에 대한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을 취한 대표적 인물로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利瑪竇], Matteo Ricci)가 있다. 그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중국에 정착하여 세계지도와 『기하원본(幾何原本)』 등 과학 기술서를 저술했고,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과 같은 유럽의 종교사상 윤리에 관한 한문 서학서를 지어 명말(明末)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1601년 이래 베이징에 머물면서 보유론(補儒論)의 선교 신학을 완성시켰다.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중국에 입국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해산된 1773년까지 400여 종 이상의 한문 서학서를 간행해서 중국에서의 서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중국에서 서학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계기는 1605년에 중국에 정착한 바뇨니([高一志], Alphonso Vagnoni)의 『서학치평(西學治平)』, 『서학수신(西學修身)』, 『서학제가(西學齊家)』와 같은 책명에서 유래되었다. 1613년 베이징에 정착한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가 서양의 학문 체계를 소개하면서 지은 『사학범(西學凡)』도 있다. 이지조(李之藻)나 서광계(徐光啓) 같은 중국인 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문을 서학으로 지칭했다. 특히 한문 서학서 전집이었던 『천학초함(天學初函)』에서는 서학을 이편(理篇) 즉 천주교 신앙 및 서양의 학술론과 기편(器篇) 즉 과학 기술편으로 나누어 서술한 이후 서학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학문적 영역이 뚜렷이 제시되었다.
  
서학을 비롯해 사부학당에는 각 학당마다 종6품의 교수(敎授, 敎授官) 2명, 정9품의 훈도 2명씩을 두고 성균관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1466년 1월 서부유학을 서학으로 개칭하면서는 겸직제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관원으로 차출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그러나 서학을 포함한 사부학당 관원은 결원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성종실록』 16년 4월 8일], 수시로 제사의 집사(執事)로 차출하기도 하여[『성종실록』 22년 5월 22일] 학당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서학 등 사학 모두에 승문원과 교서관의 [[권지(權知)]] 관원들을 훈도로 차출하여 교육시키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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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기술의 수용'''==
  
서학 등 4학은 모두 10세 이상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15세 이상인 유생들 중 학업이 어느 정도 성취되면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11년 11월 16일]). 그러나 초기부터 서학을 포함한 사부학당의 교육적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를 제고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1469년(예종 1) 5월에는 서학 등 사학 유생 중 80명을 선발해서 고강이나 제술 등 시험을 보게 하거나[『예종실록』 1년 5월 6일], [[사헌부(司憲府)]]나 예조(禮曹)가 감찰하게 하는[『성종실록』 14년 2월 27일] 등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었으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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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중국 서학 가운데 과학 기술 분야 특히 서학의 지리학과 천문역학(天文曆學)에 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603년(선조 36)에 부연(赴燕)했던 이광정(李光庭)은 ‘구라파여지도(歐羅巴輿地圖)’ 즉,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전래하여 새로운 지리 지식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17세기 초엽에는 이수광도 『곤여만국전도』와는 다른 세계지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후 서양의 지도 및 인문지리서와 지구의 등이 조선에 활발히 수입되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수정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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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내지는 지리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서학의 천문학에 대한 관심도 깊었다. 1631년(인조 9)에 정두원(鄭斗源)은 북경에서 서양인 로드리게즈([陸若漢], Joan Rodrigues)를 만나 천문 역산서를 비롯한 서학 서적과 함께 자명종(自鳴鐘), 천리경(千里鏡), [[홍이포(紅夷砲)]] 등과 그 밖의 서학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입국했다. 1644년 소현세자는 아담 샬([湯若望], Adam Schall)을 방문하여 천주상(天主像)과 천문기기류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김육(金堉)은 1645년(인조 23)에 부연사행(赴燕使行)에 [[일관(日官)]]을 대동시켜 흠천감에 가서 [[시헌력(時憲曆)]]을 탐문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12018_002 『인조실록』 23년 12월 18일]). 그리고 같은 해에 한흥일(韓興一)은 북경에서 아담 샬이 지은 천문서인 『신력효식(新曆曉式)』을 입수하여 가지고 왔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시행되던 시헌력의 완벽한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중국의 역법을 수정한 조선판 시헌력은 1653년(효종 4) 이후 태양력을 채택하게 된 1896년(건양 1)까지 조선에서 사용하던 공식 역법이 되었다. 시헌력이 채택되었던 17세기 이후에도 역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북경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던 홍대용(洪大容)이나 박지원(朴趾源)은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적극적 수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박제가(朴齊家)]]는 기하에 밝고 이용후생에 정통한 흠천감의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하여 천문, 역산, 농상, 의약, 조벽(造甓), 건축, 채광, 조선 등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의 저술이었던 『기기도설(奇器圖說)』 등의 기술서들은 18세기 말엽 정약용(丁若鏞)이 애용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연산군대에는 문묘가 철거되면서 이곳에 있던 공자와 맹자의 위판이 서학으로 옮겨지거나([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25_001 『연산군일기』 11년 1월 25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다가 중종반정 이후 정돈되었다[『중종실록』 1년 12월 4일]. 이후에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전란 이후에 복구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11030_007 『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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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은 서학의 이적(理的) 측면인 천주교 신앙이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일정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과학 기술을 포함한 서학 전반에 관한 거부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서 서학의 기적(器的) 측면에 대한 수용과 발전에는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개항을 맞게 된 조선은 서양의 르네상스적 과학 지식이었던 서학보다는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과학 사상을 새롭게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서학 등 사학의 관원은 1654년(효종 5)에는 김익희(金益熙)의 건의로 왕을 측근에서 모신 시종신(侍從臣)을 겸교수(兼敎授)로 차출하도록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채충원(蔡忠元)이 차출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5년 10월 4일]. 겸교수 직제는 이후 숙종초에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복구되어 『속대전』에 규정되었다. 영조대에 반포된 『속대전』에는 서학 사학은 모두 관원이 축소되어 교수와 훈도 각 1명이 되었다. 서학을 비롯한 사학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거의 교육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유명무실하게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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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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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중국을 통해서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서학의 주요 부분인 서학 사상 즉 스콜라 철학이나 천주교 신앙에 관한 서적도 수용하게 되었다. 서학 사상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는 17세기 초반이었다. 그리고 서학이 종교 운동의 형태로 본격적인 전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때는 1784년(정조 8)이었다. 조선에서 서학 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실천되는 대략 180여 년의 기간 동안 조선 서학은 본격적 형성의 단초가 마련되어 갔고, 1791년(정조 15)의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한 박해 이후 개항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조선 서학으로 발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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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서학 사상의 수용에는 유몽인(柳夢寅)이나 이수광(李睟光) 등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 및 『교우론』을 읽고 비평하면서 소개하였다. 그러나 서학 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때는 어쩌면 정두원이 베이징을 방문했던 1631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온 책 가운데에는 『천문략』이나 『직방외기』,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 서학서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이익(李瀷),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은 『천주실의』,『직방외기』를 비롯한 여러 한문 서학서를 읽고 비평을 가한 바 있다. 원래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초기의 인사들은 서학의 종교 신앙과 과학 기술에 대한 뚜렷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학을 일종의 신문화수용운동적(新文化受容運動的)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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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84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서학은 종교 운동으로 재출발하고, 1791년의 박해 이후 본격적인 민중 종교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서학은 신문화 수용 운동 단계에서는 사회 개혁의 이념이나 이용후생을 위한 과학 기술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단계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보유론적 논리를 수용하여 서학의 사상적 틀을 가지고 조선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단장해 보고자 했다. 일부 천주교 신도들은 보유론에 입각한 천주교 신앙을 조선 왕조에서 공인된 종교의 일환으로 용인받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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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당대의 성리학적 지성들로부터 곧 엄청난 저항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 의해 천주교 신앙에 대한 벽이단론(闢異端論)의 입장이 분명해지자 신문화 수용 운동적 입장에서 서학에 접근했던 초기 조선 천주교의 인물 중 상당수는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교적·성리학적 문화 체계에 재편입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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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탈 그룹에 속했던 이들과는 달리 본격적인 신앙 운동에 종사하고자 했던 인물들도 많았다. 그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공자와 맹자의 도[孔孟之道]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유론의 이론보다는 오히려 반유론(反儒論)의 입장에서 천주교 신앙을 선언했고, 정부의 탄압 과정에서 점차 천주교는 민중 종교 운동적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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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종교 운동으로서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신앙을 매개로 한 철학적 성찰이나 서학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고자 하는 적극적 움직임이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단계의 천주교 지도층에서는 서학의 교리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학서 중 이편(理篇)에 속하는 천주교 교리서들을 본격적으로 한글로 번역해 갔다. 대표적인 번역서는 신약성경 중 4복음서의 32% 가량을 번역하여 수록했던 『셩경직해(聖經直解)』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각종 교리서와 기도서, 묵상서 및 성인들의 전기가 번역되었다. 이 번역 작업에는 최창현(崔昌賢) 당시 천주교의 지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약종(丁若鍾)]]은 서학의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여 이를 재편성한 『쥬교요지(主敎要旨)』와 같은 한글 서적을 지어서 조선 서학의 성립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후 [[정하상(丁夏祥)]]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비롯한 각종 호교론적(護敎論的) 이론이 정리되어 등장했다. 그리고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양업(崔良業) 등에 의해 천주교의 교리를 가사체 문학으로 형상화시킨 천주가사(天主歌辭)가 등장하여 조선 서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1860년대 초반기에는 [[황석두(黃錫斗)]] 등이 프랑스 선교사를 도와 한글 천주교 서적을 간행하던 과정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며 조선 서학의 내용을 강화시켰다. 이로써 그들은 새로운 신관(神觀)에 입각하여 인간과 사회를 재해석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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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91년 이래 1882년경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되었던 천주교 탄압의 과정에서 조선 서학은 신학적 측면에서 본격적 발전을 이루는 데에는 부정적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특히 1831년 로마 교황청에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1835년 이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도들을 지도하게 된 이후로는 조선 교회에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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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교회는 교회 외부로부터 가해지던 박해와 교회 내적인 엄격주의 신앙으로 인해서 천주교 사상의 발전은 상대적 의미에서 둔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수용되었던 서학의 전통은 점차 약화되었고,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2년을 전후로 하여 천주교는 민중 종교 운동적 특성으로부터 근대 종교의 하나로 변화되어 갔다. 이로서 19세기 개항기에 이르러 조선에서는 17세기적 과학 기술 지식이나 천주교 신앙의 전통과 일정한 거리를 둔 새로운 자연과학과 근대 종교인 천주교 신앙으로 본격적인 전개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조선 서학은 전통 사회에서 성리학적 질서에 저항하면서 개항기 이후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탄력성을 제공해 주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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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조선후기천주교사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89.     
*『속대전(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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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원순, 『조선서학사연구』, 일지사, 1986.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886.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1961.       
+
*이원순, 『조선후기 천주교회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1981.       
+
*강재언, 『朝鮮의 西學史』, 민음사, 1990.      
 +
*차기진, 『조선후기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
*박성순, 『조선유학과 서양과학의 만남』, 고즈원, 2005.       
 +
*최소자, 『동서문화교류사연구』, 삼영사, 1987.       
 +
*노대환, 「조선후기 ‘서학중국원류설’의 전개와 그 성격」,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1999.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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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8 판



16세기 이래 중국과 조선에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과 사상.

개설

서학(西學)은 사상적 측면에서 서양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 신학을 기초로 한 기독교 사상을 뜻한다. 조선은 17세기 이후 중국을 왕래하던 사행을 통해서 서학 서적을 수입했고 서학을 전수받았다. 당시 서학적 과학 기술은 조선에서 천문학과 지리학 등의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나, 사변적 문화 풍토가 강했던 조선에서는 서학의 과학 기술적 측면보다는 사상적 측면에 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서학은 신문화 수용 운동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지식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여 유행처럼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서학의 사상적 측면인 천주교 신앙은 18세기 말엽 이래 성리학과 충돌을 일으켰고, 이에 사학(邪學)·사설(邪說)로 규정되어 지배층으로부터 엄격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도 서학 신봉자들은 이를 적극 수용하고 재해석해서 조선서학(朝鮮西學)을 성립시켜 나갔다.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서학이라는 용어가 과학 기술 및 천주교 신앙과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초창기 조선 정부는 서학을 탄압하면서 과학 기술과 사상을 구별하여 그 사상은 배격하되 과학 기술은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곧 서양의 과학 기술까지 억압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사상으로서의 서학은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민중 종교 운동으로 전환되어 갔고, 과학 기술적 측면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서학은 평등한 인간관을 제공해 주었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자각을 새롭게 강화시켜 나갔다.

중국 서학의 성립

16세기 말부터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주로 예수회에 소속되었다. 그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일종의 제왕학으로 존중받던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기술을 먼저 중국에 전파했다. 그들은 중국 역법(曆法)의 개량에 기여했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파함으로서 서양 수학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전했다. 현지 문화에 대한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을 취한 대표적 인물로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利瑪竇], Matteo Ricci)가 있다. 그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중국에 정착하여 세계지도와 『기하원본(幾何原本)』 등 과학 기술서를 저술했고,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과 같은 유럽의 종교사상 및 윤리에 관한 한문 서학서를 지어 명말(明末)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1601년 이래 베이징에 머물면서 보유론(補儒論)의 선교 신학을 완성시켰다.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중국에 입국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해산된 1773년까지 400여 종 이상의 한문 서학서를 간행해서 중국에서의 서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중국에서 서학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계기는 1605년에 중국에 정착한 바뇨니([高一志], Alphonso Vagnoni)의 『서학치평(西學治平)』, 『서학수신(西學修身)』, 『서학제가(西學齊家)』와 같은 책명에서 유래되었다. 1613년 베이징에 정착한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가 서양의 학문 체계를 소개하면서 지은 『사학범(西學凡)』도 있다. 이지조(李之藻)나 서광계(徐光啓) 같은 중국인 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문을 서학으로 지칭했다. 특히 한문 서학서 전집이었던 『천학초함(天學初函)』에서는 서학을 이편(理篇) 즉 천주교 신앙 및 서양의 학술론과 기편(器篇) 즉 과학 기술편으로 나누어 서술한 이후 서학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학문적 영역이 뚜렷이 제시되었다.

과학 기술의 수용

조선은 중국 서학 가운데 과학 기술 분야 특히 서학의 지리학과 천문역학(天文曆學)에 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603년(선조 36)에 부연(赴燕)했던 이광정(李光庭)은 ‘구라파여지도(歐羅巴輿地圖)’ 즉,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전래하여 새로운 지리 지식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17세기 초엽에는 이수광도 『곤여만국전도』와는 다른 세계지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후 서양의 지도 및 인문지리서와 지구의 등이 조선에 활발히 수입되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수정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지도 내지는 지리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서학의 천문학에 대한 관심도 깊었다. 1631년(인조 9)에 정두원(鄭斗源)은 북경에서 서양인 로드리게즈([陸若漢], Joan Rodrigues)를 만나 천문 역산서를 비롯한 서학 서적과 함께 자명종(自鳴鐘), 천리경(千里鏡), 홍이포(紅夷砲) 등과 그 밖의 서학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입국했다. 1644년 소현세자는 아담 샬([湯若望], Adam Schall)을 방문하여 천주상(天主像)과 천문기기류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김육(金堉)은 1645년(인조 23)에 부연사행(赴燕使行)에 일관(日官)을 대동시켜 흠천감에 가서 시헌력(時憲曆)을 탐문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었다(『인조실록』 23년 12월 18일). 그리고 같은 해에 한흥일(韓興一)은 북경에서 아담 샬이 지은 천문서인 『신력효식(新曆曉式)』을 입수하여 가지고 왔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시행되던 시헌력의 완벽한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중국의 역법을 수정한 조선판 시헌력은 1653년(효종 4) 이후 태양력을 채택하게 된 1896년(건양 1)까지 조선에서 사용하던 공식 역법이 되었다. 시헌력이 채택되었던 17세기 이후에도 역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북경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던 홍대용(洪大容)이나 박지원(朴趾源)은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적극적 수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박제가(朴齊家)는 기하에 밝고 이용후생에 정통한 흠천감의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하여 천문, 역산, 농상, 의약, 조벽(造甓), 건축, 채광, 조선 등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의 저술이었던 『기기도설(奇器圖說)』 등의 기술서들은 18세기 말엽 정약용(丁若鏞)이 애용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은 서학의 이적(理的) 측면인 천주교 신앙이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일정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과학 기술을 포함한 서학 전반에 관한 거부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서 서학의 기적(器的) 측면에 대한 수용과 발전에는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개항을 맞게 된 조선은 서양의 르네상스적 과학 지식이었던 서학보다는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과학 사상을 새롭게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전개

조선은 중국을 통해서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서학의 주요 부분인 서학 사상 즉 스콜라 철학이나 천주교 신앙에 관한 서적도 수용하게 되었다. 서학 사상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는 17세기 초반이었다. 그리고 서학이 종교 운동의 형태로 본격적인 전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때는 1784년(정조 8)이었다. 조선에서 서학 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실천되는 대략 180여 년의 기간 동안 조선 서학은 본격적 형성의 단초가 마련되어 갔고, 1791년(정조 15)의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한 박해 이후 개항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조선 서학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후기 서학 사상의 수용에는 유몽인(柳夢寅)이나 이수광(李睟光) 등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 및 『교우론』을 읽고 비평하면서 소개하였다. 그러나 서학 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때는 어쩌면 정두원이 베이징을 방문했던 1631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온 책 가운데에는 『천문략』이나 『직방외기』,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 서학서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이익(李瀷),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은 『천주실의』,『직방외기』를 비롯한 여러 한문 서학서를 읽고 비평을 가한 바 있다. 원래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초기의 인사들은 서학의 종교 신앙과 과학 기술에 대한 뚜렷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학을 일종의 신문화수용운동적(新文化受容運動的)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1784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서학은 종교 운동으로 재출발하고, 1791년의 박해 이후 본격적인 민중 종교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서학은 신문화 수용 운동 단계에서는 사회 개혁의 이념이나 이용후생을 위한 과학 기술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보유론적 논리를 수용하여 서학의 사상적 틀을 가지고 조선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단장해 보고자 했다. 일부 천주교 신도들은 보유론에 입각한 천주교 신앙을 조선 왕조에서 공인된 종교의 일환으로 용인받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당대의 성리학적 지성들로부터 곧 엄청난 저항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 의해 천주교 신앙에 대한 벽이단론(闢異端論)의 입장이 분명해지자 신문화 수용 운동적 입장에서 서학에 접근했던 초기 조선 천주교의 인물 중 상당수는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교적·성리학적 문화 체계에 재편입되어 갔다.

이러한 이탈 그룹에 속했던 이들과는 달리 본격적인 신앙 운동에 종사하고자 했던 인물들도 많았다. 그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공자와 맹자의 도[孔孟之道]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유론의 이론보다는 오히려 반유론(反儒論)의 입장에서 천주교 신앙을 선언했고, 정부의 탄압 과정에서 점차 천주교는 민중 종교 운동적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민중 종교 운동으로서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신앙을 매개로 한 철학적 성찰이나 서학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고자 하는 적극적 움직임이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단계의 천주교 지도층에서는 서학의 교리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학서 중 이편(理篇)에 속하는 천주교 교리서들을 본격적으로 한글로 번역해 갔다. 대표적인 번역서는 신약성경 중 4복음서의 32% 가량을 번역하여 수록했던 『셩경직해(聖經直解)』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각종 교리서와 기도서, 묵상서 및 성인들의 전기가 번역되었다. 이 번역 작업에는 최창현(崔昌賢) 등 당시 천주교의 지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약종(丁若鍾)은 서학의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여 이를 재편성한 『쥬교요지(主敎要旨)』와 같은 한글 서적을 지어서 조선 서학의 성립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후 정하상(丁夏祥)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비롯한 각종 호교론적(護敎論的) 이론이 정리되어 등장했다. 그리고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양업(崔良業) 등에 의해 천주교의 교리를 가사체 문학으로 형상화시킨 천주가사(天主歌辭)가 등장하여 조선 서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1860년대 초반기에는 황석두(黃錫斗) 등이 프랑스 선교사를 도와 한글 천주교 서적을 간행하던 과정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며 조선 서학의 내용을 강화시켰다. 이로써 그들은 새로운 신관(神觀)에 입각하여 인간과 사회를 재해석해 나갔다.

그러나 1791년 이래 1882년경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되었던 천주교 탄압의 과정에서 조선 서학은 신학적 측면에서 본격적 발전을 이루는 데에는 부정적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특히 1831년 로마 교황청에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1835년 이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도들을 지도하게 된 이후로는 조선 교회에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조선 교회는 교회 외부로부터 가해지던 박해와 교회 내적인 엄격주의 신앙으로 인해서 천주교 사상의 발전은 상대적 의미에서 둔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수용되었던 서학의 전통은 점차 약화되었고,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2년을 전후로 하여 천주교는 민중 종교 운동적 특성으로부터 근대 종교의 하나로 변화되어 갔다. 이로서 19세기 개항기에 이르러 조선에서는 17세기적 과학 기술 지식이나 천주교 신앙의 전통과 일정한 거리를 둔 새로운 자연과학과 근대 종교인 천주교 신앙으로 본격적인 전개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조선 서학은 전통 사회에서 성리학적 질서에 저항하면서 개항기 이후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탄력성을 제공해 주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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