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종(丁若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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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0년(영조 36) ~ 1801년(순조 1) = 42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이자 복자.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윤덕열(尹德烈)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정지해(丁志諧)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정항신(丁恒愼)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셋째 형이기도 하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서 태어난 정약종은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권철신(權哲身)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익(李瀷)의 학문을 따르며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을 버리고 도교에 잠시 탐닉하였다가 1786년(정조 10) 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서는 도교를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권일신(權日身)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신앙을 전파하는데 매진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추안급국안』] 그러던 가운데 1787년(정조 11) 발발한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으로 아버지로부터 천주교를 금하라는 말을 듣고, 또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천주교가 사회문제화 되는 것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천주교 신앙을 이어나갔다.

그는 제사를 금하는 천주교 교리로 인하여 더 이상 고향 마재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아내와 맏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그는 주변 지역 신자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였으며, 하층민 출신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 교리 지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와 교류한 신자들은 34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그는 1794년(정조 18) 무렵부터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를 하며 교리 연구를 위한 모임을 시작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정약종은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 이후 자주 서울을 왕래하며 성사를 받고 교회 일을 처리하며 지도급 신자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1799년(정조 23) 설립한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리 연구 모임을 주도하거나 회원들의 전교 활동을 관리하고 신공(神工) 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이때를 전후한 시기에 자신이 이해한 교리 지식과 신앙을 바탕으로 2책의 『쥬교요지』라는 교리서를 작성하였다. 당시 이 책을 본 주문모 신부는 중국 선교사 마이야(Mailla) 신부가 쓴 『성세추요(聖世蒭蕘)』보다 훌륭한 책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책은 널리 필사되어 읽혀지며 조선 최초의 천주교 대중 교리서로서의 구실을 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1799년(정조 23)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신헌조(申獻朝)가 정조에게 정약종·권철신·이가환(李家煥) 등의 조선 천주교 지도급 신자들을 거론하며 이들에 대한 처결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에 의해 오히려 저지되는 일도 있었다.(『정조실록』 23년 5월 25일) 그러나 정조가 1800년(순조 즉위년)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1801년(순조 1) 초 신유박해가 발발하였다.

1801년 1월 10일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박해 윤음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일 <정약종의 책롱사건(冊籠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임대인(任大仁)이 포천에 사는 홍교만(洪敎萬)의 집에 숨겨두었던 정약종의 책 상자를 박해 직후 서울송재기(宋載紀)의 집을 거쳐 황사영(黃嗣永)의 집으로 옮기려다 적발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북경 주교와 주문모 신부의 서한, 정씨 집안의 서한, 황사영의 서한, 『정약종일기』 등이 들어 있었다.[『추안급국안』],[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이 사건으로 노론(老論) 벽파에서는 남인(南人) 친서파(親西派)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며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蔡濟恭)에 대한 추탈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또한 그해 2월 10일 이가환·정약용·이승훈 등이 체포되었고, 정약종 역시 다음날인 11일 체포되어 의금부의 추국을 받게 되었다.

조정 관리들은 추국을 통해 정약종의 책롱에서 발견된 서한과 일기의 내용 등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자 하였으나, 정약종은 교회와 관련된 사실은 조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계속되는 추국의 과정 속에서도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져버리는 언행을 하지 않았고, 대신들은 정약종에 대한 사형을 지속적으로 청하였다.(『순조실록』 1년 2월 12일),(『순조실록』 1년 2월 18일),(『순조실록』 1년 2월 21일) 결국 정약종에게는 “한없이 흉악하고 지극한 패륜아이므로 하루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라는 미명하에 2월 25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순조실록』 1년 2월 25일) 다음날인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순조실록』 1년 2월 26일)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2014년 8월 15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성품과 일화

정약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특별히 도당이나 교주가 없다”라고 하며, 교회나 동료 신자들에게 해가 될법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진술한 내용이라고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거나 사망 또는 교회로부터 멀어진 예전 신자들의 행적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천주교 교리가 옳다는 것만을 설명하는데 남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입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사형장으로 가는 수레 안에서도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한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저처럼 오히려 하늘의 크신 주를 흠숭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영원한 불행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사형장에서도 칼날을 받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몸을 돌려 하늘을 보고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한 뒤 칼을 받았다고 한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묘소와 후손

정약종의 묘는 사망 직후에는 경기도 배알미리에 있었다가 1959년 4월 반월의 사사리로 이장되었으며, 1973년 5월 근처의 가족 묘지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81년 11월 1일 천진암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약종은 첫 번째 부인 이수정(李秀廷)의 딸과의 사이에서는 1남 정철상(丁哲祥)을 두었다. 두 번째 부인은 유항고(柳恒故)의 딸인데 1남 1녀를 두었으며, 1남은 정하상(丁夏祥), 1녀는 정정혜(丁情惠)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쥬교요지』
  • 『벽위편(闢衛編)』
  • 황사영, 『백서(帛書)』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1980, 한국교회사연구소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