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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금곡역|한글표제=금곡역|한자표제=金谷驛|대역어=|상위어=청단도(靑丹道)|하위어=|동의어=|관련어=역도(驛道), 속역(屬驛), 찰방(察訪), 역승(驛丞), 백주(白州), 배천군(白川郡)|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황해도|시대=고려, 조선|왕대=|집필자=성주현|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277|실록연계=}}
  
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자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 위치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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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남도 배천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개설'''==
  
금곡역(金谷驛)은 고려전기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덕산역(德山驛)‧성잉역(省仍驛)‧적정역(赤頂驛)‧대역(大驛)‧영포역(靈浦驛)‧[[창인역(昌仁驛)]]‧[[자여역(自如驛)]]‧번곡역(繁谷驛)‧[[근주역(近珠驛)]]‧무을이역(無乙伊驛)‧영안역(永安驛)‧용가역(用家驛)‧[[내야역(內也驛)]]‧성을현역(省乙峴驛)‧유천역(楡川驛)‧서지역(西之驛)‧[[매전역(買田驛)]]‧병산역(竝山驛)‧일문역(一門驛)‧온정역(溫井驛)‧양주역(梁州驛)‧[[황산역(黃山驛)]]‧원포역(源浦驛)‧[[위천역(渭川驛)]]‧[[소산역(蘇山驛)]]‧아등량역(阿等良驛)‧굴화역(屈火驛)‧간곡역(肝谷驛)‧덕천역(德川驛) 등 31개 역과 함께 김주도(金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자여도(自如道)]]를 구성하는 15개 속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경상도 김해군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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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역(金谷驛)은 고려전기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산예역(狻猊驛)‧심동역(深洞驛)‧청단역(靑端驛)‧가율역(嘉栗驛)‧[[망정역(望汀驛)]]‧금강역(金剛驛)‧양계역(楊溪驛)‧[[유안역(維安驛)]]‧좌구역(佐丘驛) 등 10개 역과 함께 산예도(狻猊道)에 소속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청단도(靑丹道)]]를 구성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배천군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김주도에 소속된 31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김해시에 해당하는 김주(金州)에 위치해 있었다.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1061년(고려 문종 15)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여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금곡역과 더불어 자여역‧근주역‧[[신풍역(新豊驛)]]‧[[안민역(安民驛)]]‧창인역‧영포역‧김해신역(金海新驛)‧대산신역(大山新驛)‧남역(南驛)‧덕산역‧성법역(省法驛)‧[[적항역(赤項驛)]]‧웅신신역(熊神神驛) 등 15개 속역이 자여도에 소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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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금곡역은 고려 산예도에 소속된 10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황해남도 배천군에 해당하는 백주(白州)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1061년(고려 문종 15)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청단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단역‧심동역‧유안역·금강역·망행역(望行驛)‧문라역(文羅驛)‧금동역(金洞驛)‧[[신행역(新行驛)]] 등과 함께 청단도에 속해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 김해군 조에 따르면, 금곡역에는 [[역리(驛吏)]] 39명, 역노(驛奴) 12명과 대마(大馬) 1필,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7필 등 총 10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경상도 지역의 역도인 자여도의 속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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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금곡역에는 역노(驛奴)와 역비(驛婢)는 없었으며, 역마 5필만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변천'''==
  
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을 정비하였는데, 역로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지 못하는 등 각종 폐단이 생겼기 때문에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여러 역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경상도에서는 금곡역을 비롯한 자여도의 속역과 [[소촌도(召村道)]]의 속역을 소촌도로 통합하였다.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였는데, 이때 금곡역은 자여역·근주역 등과 함께 자여도역승의 관할로 복구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자여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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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였는데, 이때 금곡역은 청단역·심동역 등 9개 역과 더불어 청단도찰방이라 하였다. 청단도의 본역은 해주에 위치한 청단역으로, 이곳에는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금곡역은 김해군 관아 북쪽 35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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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해도 배천군 조에 따르면, 금곡역은 배천 관아 동남쪽 25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리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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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정요근, 「고려·조선초의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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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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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1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남도 배천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금곡역(金谷驛)은 고려전기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산예역(狻猊驛)‧심동역(深洞驛)‧청단역(靑端驛)‧가율역(嘉栗驛)‧망정역(望汀驛)‧금강역(金剛驛)‧양계역(楊溪驛)‧유안역(維安驛)‧좌구역(佐丘驛) 등 10개 역과 함께 산예도(狻猊道)에 소속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청단도(靑丹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배천군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금곡역은 고려 산예도에 소속된 10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황해남도 배천군에 해당하는 백주(白州)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1061년(고려 문종 15)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청단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단역‧심동역‧유안역·금강역·망행역(望行驛)‧문라역(文羅驛)‧금동역(金洞驛)‧신행역(新行驛) 등과 함께 청단도에 속해 있다.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금곡역에는 역노(驛奴)와 역비(驛婢)는 없었으며, 역마 5필만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였는데, 이때 금곡역은 청단역·심동역 등 9개 역과 더불어 청단도찰방이라 하였다. 청단도의 본역은 해주에 위치한 청단역으로, 이곳에는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해도 배천군 조에 따르면, 금곡역은 배천 관아 동남쪽 25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리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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