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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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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송시열·송준길>의 문하에서 예론을 익혔는데,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그 문하생의 중심이 되었다. 두 선생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며 간혹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일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궁리하느라 몸이 야윌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한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실패한 다음에, 과거 공부는 학문의 뜻을 빼앗는다고 하여 포기해 버렸다.
 
일찍이 송시열·송준길>의 문하에서 예론을 익혔는데,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그 문하생의 중심이 되었다. 두 선생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며 간혹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일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궁리하느라 몸이 야윌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한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실패한 다음에, 과거 공부는 학문의 뜻을 빼앗는다고 하여 포기해 버렸다.
  
송시열이 매번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칭찬하였고 재랑(齋郞)으로 추천하여 그는 [[목릉(穆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그도 화(禍)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목천으로 돌아왔다. 그해 유배된 송시열에게 사약(死藥)을 내리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상소를 올리도록 주도한 사람이 바로 곽시징이었다. 송시열이 사사된 후 태안(泰安)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닦았는데, 그를 따르는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學子)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하므로, 그는 율곡(栗谷)이이(李珥)가 후생을 지도하는 법에 따라서 그들을 가르쳤다. 1694년(숙종20) 목천의 옛집으로 돌아와 도(道)를 강론하면서 여가에 산수(山水)를 즐겼다. 노론이 집권하자, 서울에 올라가서 왕자사부(王子師父)를 지내다가, 만년에 충청도 공주(公州) 둔촌(遯村)에 집을 짓고 살았다. 1713년(숙종39) 4월에 죽으니, 향년 7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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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매번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칭찬하였고 재랑(齋郞)으로 추천하여 그는 [[목릉(穆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그도 화(禍)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목천으로 돌아왔다. 그해 유배된 송시열에게 사약(死藥)을 내리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상소를 올리도록 주도한 사람이 바로 곽시징이었다. 송시열이 사사된 후 태안(泰安)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닦았는데, 그를 따르는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學子)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하므로, 그는 율곡(栗谷)이이(李珥)가 후생을 지도하는 법에 따라서 그들을 가르쳤다. 1694년(숙종20) 목천의 옛집으로 돌아와 도(道)를 강론하면서 여가에 산수(山水)를 즐겼다. 노론이 집권하자, 서울에 올라가서 왕자사부(王子師父)를 지내다가, 만년에 충청도 공주(公州) 둔촌(遯村)에 집을 짓고 살았다. 1713년(숙종39) 4월에 죽으니, 향년 70세였다.
  
 
=='''영조의 사부'''==
 
=='''영조의 사부'''==

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총론

[1644년(인조22)~1713년(숙종39) = 70세]. 조선 중기 숙종(肅宗) 때 활동한 유학자. 자는 경숙(敬叔)· 지숙(智叔)이고, 호는 경한재(景寒齋)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충청도 목천(木川) 출신이다.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곽지흠(郭之欽)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서 예론(禮論)을 익히고, 노론(老論)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영조(英祖)가 왕자일 때 사부(師父)였다.

숙종 시대의 활동

일찍이 송시열·송준길>의 문하에서 예론을 익혔는데,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그 문하생의 중심이 되었다. 두 선생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며 간혹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일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궁리하느라 몸이 야윌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한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실패한 다음에, 과거 공부는 학문의 뜻을 빼앗는다고 하여 포기해 버렸다.

송시열이 매번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칭찬하였고 재랑(齋郞)으로 추천하여 그는 목릉(穆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그도 화(禍)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목천으로 돌아왔다. 그해 유배된 송시열에게 사약(死藥)을 내리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상소를 올리도록 주도한 사람이 바로 곽시징이었다. 송시열이 사사된 후 태안(泰安)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닦았는데, 그를 따르는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學子)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하므로, 그는 율곡(栗谷)이이(李珥)가 후생을 지도하는 법에 따라서 그들을 가르쳤다. 1694년(숙종20) 목천의 옛집으로 돌아와 도(道)를 강론하면서 여가에 산수(山水)를 즐겼다. 노론이 집권하자, 서울에 올라가서 왕자사부(王子師父)를 지내다가, 만년에 충청도 공주(公州) 둔촌(遯村)에 집을 짓고 살았다. 1713년(숙종39) 4월에 죽으니, 향년 70세였다.

영조의 사부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으로 잠저(潛邸)에 있던 1703년(숙종29)에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임명되었다. 영조가 그때 아직 어렸으나, 그는 글의 뜻을 상세하게 되풀이하고 흥미를 갖도록 널리 비유를 하면서 설명하였다. 또 ‘효도하고 우애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라[孝友恭儉]’는 네 글자를 학문하는 큰 근본으로 삼도록 가르치고, 손수 이것을 큰 글자로 써서 왕자에게 바쳤다. 그는 『소학(小學)』을 읽고 모든 일을 소학의 가르침대로 따라서 행하도록 권유하였다. 학문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깨달은 영조가 마음을 기울여 그를 공경하고 신임하여, 그가 관직을 떠난 이후에도 학문과 정책에 대하여 자문하였다. 1708년(숙종34) 영의정(領議政)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6품의 강경(講經)별제(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이 되었다. 그가 이인도찰방으로 있을 때 젊은 왕자 영조에게 ‘효(孝)· 우(友)· 공(恭)· 검(儉)’의 네 글자를 가지고 거듭 학문과 수양에 힘쓰면서 『소학』을 익숙하게 읽고, 겸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보도록 권유하였다. 영조의 학문적 재능은 타고난 바이지만, 근원에 물을 대고 깊이 있게 한 것은 그에게 힘입은 바가 많았다. 영조는 그가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직접 전송연을 베풀었으며, 심지어 그가 병이 났을 때 근심 걱정하여 내의(內醫)를 보냈고, 그의 상사(喪事)에 부의(賻儀)를 특별히 보내어 스승의은혜로써 대우하였다.

성품과 일화

곽시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품성은 어질고 너그러웠다. 학문은 실천을 중시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서 잠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남에게 겸양하고 공손하라고 가르쳤다. 스스로 잘난 체 뽐내는 것을 병으로 여겼으며, 나약하고 광채만 내는 것을 폐단으로 여겼다. 일을 절제하기를 반드시 공경으로 하고, 자신의 몸가짐은 반드시 근신하여, 아무리 이익과 손해가 번갈아 오더라도 본래의 지조를 바꾸지 아니하였다. 병이 들어 사사로이 있을 때에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임종 때에 시중드는 자가 정침(正寢)의 병풍을 거꾸로 설치한 것을 보고 꾸짖으며 자리를 바로 놓게 하고 나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목천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윤봉조(尹鳳朝)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典)』
  •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 『한수재집(寒水齎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농은유고(農隱遺稿)』
  • 『경암유고(敬庵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