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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471년(성종2)∼1521년(중종16) = 51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영남 출신 사림파.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다. 본관은 안동의 감천(甘泉)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예천(醴泉) 용궁(龍宮)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문빈(文彬)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성균관 [[사성(司成)]]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부위(副尉)]]문숭질(文崇質)의 손자이고, 사헌부 [[장령(掌令)]]문관(文瓘)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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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성종2)∼1521년(중종16) = 51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영남 출신 사림파.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다. 본관은 안동의 감천(甘泉)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예천(醴泉) 용궁(龍宮)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문빈(文彬)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성균관 [[사성(司成)]]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부위(副尉)]]문숭질(文崇質)의 손자이고, 사헌부 [[장령(掌令)]]문관(文瓘)의 형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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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직후 추가 관직 삭탈'''==
 
=='''기묘사화 직후 추가 관직 삭탈'''==
  
1519년(중종14) 11월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는데, 마침 공무를 협의하러 상주로 온 이항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시험하여, 그가 기묘사화에 대해 불평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기묘사화> 직후 이항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는데, 1520년(중종15)에 [[대간(臺諫)]]에서 문근을 조광조 일당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문근은 경상우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고 경상좌 · 우도는 다시 경상도로 병합되었다. 1521년 문근은 다시 형조 참판에 기용되었으나,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도의(道義)를 가장하여 명성을 도둑질한 자’라고 낙인찍혀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나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 죽은 뒤에도 문근은 추탈(追奪)되었고, 사건에 연루된 다른 이들, 곧 유운(柳雲) · 유인숙(柳仁淑) · 정순붕(鄭順朋) · [[신광한(申光漢)]] · 이성동(李盛同)·[[박영(朴英)]] 등도 추가 논죄되어 삭탈되었다. 그는 영남 사림파로서 기호 출신 신진 사림파와 [[반정(反正)]] 공신 훈구파(勳舊派)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다가, 훈구파로부터 조광조와 너무 가깝다고 지탄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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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중종14) 11월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는데, 마침 공무를 협의하러 상주로 온 이항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시험하여, 그가 기묘사화에 대해 불평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기묘사화> 직후 이항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는데, 1520년(중종15)에 [[대간(臺諫)]]에서 문근을 조광조 일당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문근은 경상우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고 경상좌 · 우도는 다시 경상도로 병합되었다. 1521년 문근은 다시 형조 참판에 기용되었으나,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도의(道義)를 가장하여 명성을 도둑질한 자’라고 낙인찍혀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나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 죽은 뒤에도 문근은 추탈(追奪)되었고, 사건에 연루된 다른 이들, 곧 유운(柳雲) · 유인숙(柳仁淑) · 정순붕(鄭順朋) · [[신광한(申光漢)]] · 이성동(李盛同)·[[박영(朴英)]] 등도 추가 논죄되어 삭탈되었다. 그는 영남 사림파로서 기호 출신 신진 사림파와 [[반정(反正)]] 공신 훈구파(勳舊派)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다가, 훈구파로부터 조광조와 너무 가깝다고 지탄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품과 일화'''==
 
=='''성품과 일화'''==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총론

[1471년(성종2)∼1521년(중종16) = 51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영남 출신 사림파.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다. 본관은 안동의 감천(甘泉)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예천(醴泉) 용궁(龍宮)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문빈(文彬)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성균관 사성(司成)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부위(副尉)문숭질(文崇質)의 손자이고, 사헌부 장령(掌令)문관(文瓘)의 형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2년(성종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 예문관 검열에 보임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고, 예조 · 병조 · 이조의 좌랑을 거쳐, 사헌부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1508년(중종3)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나갔다가, 그 뒤에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고, 1512년(중종7) 어버이 봉양을 위해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1516년(중종11)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고, 중종의 신임을 받아 왕세자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1517년(중종12)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이어 도승지(都承旨)로 영전하였다. 1518년(중종13) 형조 참판을 거쳐 경상우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주목사(尙州牧使)를 겸임하였다. 이때 영남(嶺南) 지방은 땅이 넓다고 하여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었는데, 경상우도에는 문근이, 경상좌도에는 이항(李沆)이 각각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기묘사화 직후 추가 관직 삭탈

1519년(중종14) 11월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는데, 마침 공무를 협의하러 상주로 온 이항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시험하여, 그가 기묘사화에 대해 불평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기묘사화> 직후 이항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는데, 1520년(중종15)에 대간(臺諫)에서 문근을 조광조 일당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문근은 경상우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고 경상좌 · 우도는 다시 경상도로 병합되었다. 1521년 문근은 다시 형조 참판에 기용되었으나,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도의(道義)를 가장하여 명성을 도둑질한 자’라고 낙인찍혀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나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 죽은 뒤에도 문근은 추탈(追奪)되었고, 사건에 연루된 다른 이들, 곧 유운(柳雲) · 유인숙(柳仁淑) · 정순붕(鄭順朋) · 신광한(申光漢) · 이성동(李盛同)·박영(朴英) 등도 추가 논죄되어 삭탈되었다. 그는 영남 사림파로서 기호 출신 신진 사림파와 반정(反正) 공신 훈구파(勳舊派)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다가, 훈구파로부터 조광조와 너무 가깝다고 지탄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품과 일화

문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모습은 체격이 크고 헌칠하여 절벽처럼 우뚝한 기상이 있었고, 그의 자질과 성품은 꿋꿋하고 곧았으며, 질박(質朴)하고 정직하였다. 1518년(중종13) 경연(經筵)석강(夕講)에서 조광조와 짝을 이뤄 ‘성의(誠意)’에 대하여 서로 토론하였는데, 이 토론이 매우 유익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조광조는 그를 “순수하고 정직하여 옛 사람의 기풍이 있습니다.”고 칭찬하였고, 문근도 조광조를 “이락 연원(伊洛淵源: 주자학의 바탕)의 학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고 칭찬하였다. 문근이 도승지로 있을 때, 신진 사류(士類)를 조정에 끌어들인 안당(安瑭)을 천거하여, 그가 정승이 되는 데 일조하였다. 이런 일들 때문에 훈구파가 그를 미워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예천 용궁 서쪽 지만산(知滿山)의 언덕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예천 용궁의 기천정사(箕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기씨(奇氏)이고, 아들은 문홍수(文弘壽)이며, 손자는 문산두(文山斗)이다. 측실의 손자 문기명(文起明) · 문응명(文應命)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학사집(鶴沙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각잡기(東閣雜記)』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충재집(冲齋集)』
  • 『모재집(慕齋集)』
  • 『음애집(陰崖集)』
  • 『학포집(學圃集)』
  • 『사재집(思齋集)』
  • 『충암집(冲庵集)』
  • 『송재집(松齋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목재집(木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