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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소곶역|한글표제=소곶역|한자표제=所串驛|대역어=|상위어=대동도(大同道)|하위어=|동의어=|관련어=관로찰방(館路察訪), 속역(屬驛), 역도(驛道), 역마(役馬), 역로(驛路), 역승(驛丞), 역참(驛站), 파발(擺撥)|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朝鮮)|왕대=|집필자=이승민|설치시기=15세기경|폐지시기=1896년(건양 1) 1월|소속관서=병조(兵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84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2 『세종실록』 6년 3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7025_004 『세종실록』 16년 7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6017_004 『성종실록』 8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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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의 도로망인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위치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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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의 도로망인 기린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북도 곡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개설'''==
  
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에 속한 역이었다. 그 뒤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大同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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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기린도(麒麟道)]]에 속한 역이었다.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제(驛制)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면서 기린도 관할 역의 하나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정녕현 편에 따르면, 소곶역은 정녕현에 설치된 유일한 역관(驛館)이었다.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춤에 따라 [[생양역(生陽驛)]]·[[대동역(大同驛)]]·[[안정역(安定驛)]] 등과 함께 평안도 관로찰방 소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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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곡산군 편에 따르면, 소곶역의 이름은 소곶지(所串之)였다고 하였다.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기린역(麒麟驛)·달만역(達滿驛)·삼지역(三支驛) 등과 함께 기린도 [[역승(驛丞)]]이 관할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평안도 의주 편에 따르면, 소곶역에는 역마 4필과 역노(驛奴) 90명, 역비(驛婢) 8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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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소곶역에는 복마(卜馬) 2필과 [[역리(驛吏)]] 3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변천'''==
  
소곶역은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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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전국적인 역로 조직이 마련되었으나, 세조대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먼 까닭에 순시하기가 어려워 역로가 쇠퇴해지는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驛站)]]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을 두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소곶역은 그 과정에서 기린역·다만역(茶滿驛)·[[원산역(元山驛)]] 등과 함께 기린도찰방이 관할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8005_004 『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기린도에 속한 역으로 유지되었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곶역은 조선전기에는 소곶관(所串館)으로, 조선후기에는 소관참(所串站)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1424년(세종 6)에는 소곶관·운흥관(雲興館)·거연관(車輦館) 등의 관(館)이 신안참(新安站)·임반참(林畔站)·양책참(良策站)·의순참(義順站) 등 각 참(站)의 중앙 요지에 해당하므로, 지방 관아의 경비 조달을 위한 토지인 늠전(廩田)을 더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역에서 역마를 길러 공용으로 바치는 입마(立馬)가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 각 관에 있는 보충군(補充軍)과 혁파한 절의 사내종 가운데에서 지원자를 받아 참(站)마다 10호씩 더 정착해 살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2 『세종실록』 6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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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곶역은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곡산군 북쪽 15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곡산군 북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 따르면, 곡산군 청계면 문양리에 있었다고 한다.
 
 
한편, 신안관에서 임반관, 임반관에서 양책관, 양책관에서 의주까지의 역 간 거리가 멀어 역마가 견디지 못하고 죽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자, 1434년(세종 16)에는 규모가 작은 소관(小館)인 소곶관·운흥관·거연관 등 세 관을 대관(大館)의 격에 따라 처우하여 역민(驛民)과 역마를 더 두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7025_004 『세종실록』 16년 7월 25일]).
 
 
 
1477년(성종 8)에는 소곶관에 설치한 목책이 견고하지 못하므로, 근처에 있는 옛 성터를 수축하여 병사를 주둔시키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6017_004 『성종실록』 8년 6월 17일]). 이를 통해 소곶관을 비롯한 평안도의 각 관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역관이자 외적을 막아 내기 위한 주요 방어 진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곶역은 원래 의주목 정녕현에 있었는데, 1444년(세종 26)에 방산현(方山縣)으로 옮겨졌다.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의주목 관아 남쪽 33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관아 남쪽 35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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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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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황해도의 도로망인 기린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북도 곡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기린도(麒麟道)에 속한 역이었다.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제(驛制)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면서 기린도 관할 역의 하나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곡산군 편에 따르면, 소곶역의 이름은 소곶지(所串之)였다고 하였다.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기린역(麒麟驛)·달만역(達滿驛)·삼지역(三支驛) 등과 함께 기린도 역승(驛丞)이 관할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소곶역에는 복마(卜馬) 2필과 역리(驛吏) 3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조선전기 세종 연간에 전국적인 역로 조직이 마련되었으나, 세조대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먼 까닭에 순시하기가 어려워 역로가 쇠퇴해지는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驛站)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을 두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소곶역은 그 과정에서 기린역·다만역(茶滿驛)·원산역(元山驛) 등과 함께 기린도찰방이 관할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기린도에 속한 역으로 유지되었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소곶역은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곡산군 북쪽 15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곡산군 북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 따르면, 곡산군 청계면 문양리에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