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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성주 무흘산(武屹山)의 9곡(曲) 중에서 가장 산세가 험악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산골짜기 동학(洞壑)으로 들어가서 칡덩굴 우거진 곳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별호를 ‘등암(藤庵)’, 또는 ‘등암수(藤庵叟)’라 일컬으면서,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숨어서 살았다. 1631년(인조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과 승려 천식(天植) 등과 함께 [[모반(謀反)]]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그도 이 모반 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를 당하였다. 그는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義禁府)]]에서 참혹한 심문을 받았으나, 무고로 밝혀져서 풀려났다. | 형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성주 무흘산(武屹山)의 9곡(曲) 중에서 가장 산세가 험악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산골짜기 동학(洞壑)으로 들어가서 칡덩굴 우거진 곳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별호를 ‘등암(藤庵)’, 또는 ‘등암수(藤庵叟)’라 일컬으면서,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숨어서 살았다. 1631년(인조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과 승려 천식(天植) 등과 함께 [[모반(謀反)]]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그도 이 모반 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를 당하였다. 그는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義禁府)]]에서 참혹한 심문을 받았으나, 무고로 밝혀져서 풀려났다. |
2018년 1월 9일 (화) 22:4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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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배상룡 |
한글표제 | 배상룡 |
한자표제 | 裵尙龍 |
분야 | 학자, 교육·언론인/유일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종~효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자장(子章) |
호 | 등암(藤庵), 등암수(藤庵叟)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4년(선조7) |
사망 | 1655년(효종6) |
본관 | 성산(星山) |
주거지 | 경상도 성주(星州) |
묘소소재지 | 경상도 거창(居昌) 물법(勿法) 후리곡(厚理谷) |
조부 | 배덕문(裴德文) · 배덕룡(裴德龍)「실록」 |
부 | 배설(裵稧) |
모_외조 | 야성송씨(冶城宋氏): 송원(宋源)의 딸 |
형제 | (형)배상충(裴尙忠) (동생)배상호(裵尙虎) |
처_장인 | 거창신씨(居昌愼氏): 신인서(愼仁恕)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자)배세위(裵世緯) (2자)배세기(裵世紀) (1녀)이유전(李惟銓)의 처 (2녀)김시수(金是燧)의 처 |
저술문집 | 『등암집(藤庵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배상룡(裵尙龍) |
총론
[1574년(선조7)~1655년(효종6) = 82세]. 조선 후기 선조~효종 때의 유일.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 등암수(藤庵叟)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배설(裵稧)이며, 어머니 야성송씨(冶城宋氏)는 충순위(忠順衛)송원(宋源)의 딸이다. 한강(寒岡)정구(鄭逑)와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선조~효종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재주와 식견이 남들보다 뛰어났는데, 정구와 장현광의 가르침을 받고, 왜란 중에도 힘써 공부하여 향시(鄕試)와 초시(初試) 등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아버지 배설(裵楔)은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로 도통사(都統使)원균(元均)의 지휘 아래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 참가하였다가 대패하자 불타는 배를 버리고 도망쳐 숨어 버렸다. 조정에서 이순신(李舜臣)을 도통사로 임명하는 한편 도망친 장수들을 수색하였는데, 배설을 찾아내지 못하자 배설의 아버지 배덕룡(裴德龍: 裴德文)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을 옥에 가두었다. 1599년(선조32) 도원수권율(權慄)이 경상도 선산(善山)에서 배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자, 조정에서 그를 참수하였고 배상룡의 조부와 형은 3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다. 배상룡도 함께 옥에 갇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으로 온가족이 큰 고통을 겪었고 그도 죄인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막내 동생 배상호(裵尙虎)를 직접 가르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시키고 태학(太學: 성균관)에도 입학시켰는데, 이때 그 아우마저 죽었기 때문에 더욱더 참담하여 죽지 못하여 살면서 세상사에 즐거움을 잃었다.
형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성주 무흘산(武屹山)의 9곡(曲) 중에서 가장 산세가 험악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산골짜기 동학(洞壑)으로 들어가서 칡덩굴 우거진 곳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별호를 ‘등암(藤庵)’, 또는 ‘등암수(藤庵叟)’라 일컬으면서,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숨어서 살았다. 1631년(인조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과 승려 천식(天植) 등과 함께 모반(謀反)을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그도 이 모반 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를 당하였다. 그는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義禁府)에서 참혹한 심문을 받았으나, 무고로 밝혀져서 풀려났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홍타지에게 항복한 다음에는 더욱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약초를 캐 먹으면서 살았다. 혹자가 그를 현량(賢良)으로 천거하려고 하면,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은일(隱逸)로서 묵묵히 살아갔다 1637년(인조15)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종6품상 선교랑(宣敎郞)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깊은 산골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가 1655년(효종6) 노병으로 죽으니, 나이는 82세였다. 그는 임종할 때 그의 무덤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고 ‘숭정 처사(崇禎處士)’라고만 쓰도록 유언하였다.
저서로는 『등암집(藤庵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배상룡은 자신을 엄정하게 간수하여, 비록 산속에서 산나물과 풀뿌리를 캐먹고 살아도 의관(衣冠)을 정재하고 책을 읽으면서 유학자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다. 평생 선행(善行)을 좋아하고, 남의 허물을 보면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하였다. 유학의 가르침대로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 먼저 독실한 행실을 함으로써 인애(仁愛)가 자기와 소원한 사람에게까지 두루 미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온 집안사람에게 인애를 베풀어서 집안 형제 사이에 인정과 사랑이 넘쳤다. 그러나 집안의 관혼상제(冠婚喪祭)는 반드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대로 행하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겼다. 그는 은일(隱逸)로서 순실하게 처세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추천하였다. 그 손자 배정휘(裵正徽)와 증손자 배윤명(裵胤命)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달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성주(星州) 금물법(今勿法) 후리곡(厚理谷)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고, 그의 친구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1774년(영조50) 통훈대부(通訓大夫)사복시(司僕寺)정(正)에 증직되었다. 성주의 도천향사(道川鄕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거창신씨(居昌愼氏)는 사재감(司宰監) 정신인서(愼仁恕)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배세위(裵世緯)이고, 차자는 배세기(裵世紀)이다. 배세위의 아들 배정휘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고, 그 손자 배윤명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여헌집(旅軒集)』
- 『대동야승(大東野乘)』
- 『응천일록(凝川日錄)』
- 『면우집(俛宇集)』
- 『완정집(浣亭集)』
- 『석담집(石潭集)』
- 『양직집(養直集)』
- 『국담집(菊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