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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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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이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인 1823년(순조 23) 2월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아래로 묘역인 [[휘경원(徽慶園)]]을 결정하고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해당한다.[『순조실록』순조 23년 2월 3일, 순조 23년 2월 26일] 그 후 1855년(철종 6) 휘경원이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천장(遷葬)]]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0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내각리에 있는 선조(宣祖)의 후궁 [[김인빈(金仁嬪)]]의 묘소인 [[순강원(順康園)]]으로 휘경원을 옮겼다.[『철종실록(哲宗實錄)』철종 6년 1월 18일, 철종 6년 10월 6일, 철종 7년 4월 10일] 그러나 그로부터 8년 후인 1863년(철종 14)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또 한 번 휘경원을 천장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5월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로 천장을 하였다.[『철종실록』철종 14년 2월 7일, 철종 14년 5월 8일] 현재 휘경원에는 봉분과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그리고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 등이 있다. 정자각 앞에 있는 묘비의 비명(碑名)은 ‘유명조선국현목수빈휘경원(有明朝鮮國顯穆綏嬪徽慶園)’이다. 한편 휘경원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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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이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인 1823년(순조 23) 2월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아래로 묘역인 [[휘경원(徽慶園)]]을 결정하고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해당한다.[『순조실록』순조 23년 2월 3일, 순조 23년 2월 26일] 그 후 1855년(철종 6) 휘경원이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천장(遷葬)]]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0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내각리에 있는 선조(宣祖)의 후궁 [[김인빈(金仁嬪)]]의 묘소인 [[순강원(順康園)]]으로 휘경원을 옮겼다.[『철종실록(哲宗實錄)』철종 6년 1월 18일, 철종 6년 10월 6일, 철종 7년 4월 10일] 그러나 그로부터 8년 후인 1863년(철종 14)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또 한 번 휘경원을 천장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5월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로 천장을 하였다.[『철종실록』철종 14년 2월 7일, 철종 14년 5월 8일] 현재 휘경원에는 봉분과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그리고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 등이 있다. 정자각 앞에 있는 묘비의 비명(碑名)은 ‘유명조선국현목수빈휘경원(有明朝鮮國顯穆綏嬪徽慶園)’이다. 한편 휘경원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박수빈의 사당은 1824년(순조 24) 서울의 북쪽인 양덕방(陽德坊), 현재의 계동에 지었으며, [[경우궁(景祐宮)]]이라 하였다.[『순조실록』순조 24년 12월 1일] 이는 박수빈이 임금의 생모라고 하더라도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기 때문에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서 별묘(別廟)를 지어 따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70년(고종 7) 김영빈(金寧嬪)과 윤화빈(尹和嬪)의 신주를 경우궁에 함께 모셨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7년 2월 26일] 그런데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하면서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등을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이 곧 실패로 돌아가면서 고종은 이재원(李載元)의 집을 거쳐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인 1885년(고종 22) 경우궁이 역적 무리들에게 더럽혀졌다며 경우궁을 이동하도록 명하였다.[『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8일, 고종 22년 12월 26일] 이에 1886년(고종 23) 5월 인왕동, 현재의 옥인동으로 경우궁을 옮겼다.[『고종실록』고종 23년 5월 28일, 고종 23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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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의 사당은 1824년(순조 24) 서울의 북쪽인 양덕방(陽德坊), 현재의 계동에 지었으며, [[경우궁(景祐宮)]]이라 하였다.[『순조실록』순조 24년 12월 1일] 이는 박수빈이 임금의 생모라고 하더라도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기 때문에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서 별묘(別廟)를 지어 따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70년(고종 7) 김영빈(金寧嬪)과 윤화빈(尹和嬪)의 신주를 경우궁에 함께 모셨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7년 2월 26일] 그런데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하면서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등을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이 곧 실패로 돌아가면서 고종은 이재원(李載元)의 집을 거쳐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인 1885년(고종 22) 경우궁이 역적 무리들에게 더럽혀졌다며 경우궁을 이동하도록 명하였다.[『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8일, 고종 22년 12월 26일] 이에 1886년(고종 23) 5월 인왕동, 현재의 옥인동으로 경우궁을 옮겼다.[『고종실록』고종 23년 5월 28일, 고종 23년 5월 30일]
  
 
한편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경우궁의 신주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등과 함께 육상궁으로 옮겨졌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이어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경우궁의 신주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등과 함께 육상궁으로 옮겨졌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이어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2018년 1월 9일 (화) 22:43 기준 최신판




총론

[1770년(영조 46)~1822년(순조 22) = 53세].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의 후궁이자, 23대 임금인 순조(純祖)의 어머니.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이며, 시호는 현목(顯穆)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박준원(朴準源)이며, 어머니는 원주 원씨(原州元氏)로 증참판(贈參判)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주판관(公州判官)박사석(朴師錫)이고, 증조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박필리(朴弼履)이다. 1787년(정조 11) 삼간택을 통하여 수빈(綏嬪)의 빈호를 하사 받고, 정조의 후궁이 되었다.

정조~순조 시대의 활동

정조는 1782년(정조 6) 성의빈(成宜嬪)과의 사이에서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낳았으나, 문효세자는 5살 되던 1786년(정조 10)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6년 9월 7일, 정조 10년 6월 20일] 게다가 정조는 정비(正妃)인 효의왕후(孝懿王后)와의 사이에서는 후사가 생기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후궁을 들여 후사를 잇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삼간택을 실시한 결과 최종적으로 박준원의 딸이 간택되어, 수빈의 빈호와 가순궁(嘉順宮)의 궁호를 하사 받았다.[『순조실록』순조 23년 2월 3일] 이렇게 궁에 들어온 박수빈(朴綏嬪)은 1770년(영조 46) 5월 8일에 좌찬성박준원과 원경유의 딸인 원주 원씨 사이에서 3녀로 태어났으며, 간택 당시 18세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23년 2월 3일]

1787년(정조 11) 2월 정조와 혼인을 한 박수빈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790년(정조 14) 6월 왕자를 낳았는데, 이 왕자가 훗날의 순조이다.[『정조실록』정조 11년 2월 8일, 정조 11년 2월 11일, 정조 11년 2월 12일, 정조 14년 6월 18일] 박수빈의 첫째 아들은 11세가 되던 1800년(정조 24)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6월 아버지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7월에 창덕궁(昌德宮)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정조실록』정조 24년 2월 22일, 정조 24년 6월 28일, 『순조실록』순조 즉위년 7월 4일] 그러나 순조의 나이가 11세로 아직 어렸으므로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다.[『순조실록』순조 즉위년 7월 4일]

한편 박수빈은 임금을 낳은 후궁들 가운데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직접 본 유일한 후궁이었다. 이것은 정조가 순조 이후 더 이상의 아들을 낳지 않은데다가, 박수빈도 정치에 크게 간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순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박수빈은 임금의 생모로서, 당시 대왕대비이던 정순왕후와 왕대비이던 효의왕후, 그리고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다음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순조실록』순조 즉위년 8월 7일] 이러한 지위에도 박수빈은 조용히 궁 생활을 하면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1802년(순조 2) 숙선옹주(淑善翁主)에게 봉작을 내리는 과정을 들 수 있다. 당시 정순왕후가 숙선옹주는 그 어머니인 박수빈이 정식 간택을 통하여 들어왔으므로 다른 후궁들의 소생과 다르고, 또 순조의 유일한 동생이므로 공주보다는 낮고 옹주보다는 높은 봉작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분란이 발생하였다. 이때 박수빈이 정순왕후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분란을 피하였던 것이다.[『순조실록』순조 2년 11월 17일]

이후 박수빈은 큰 분란 없이 궁 생활을 이어나갔고, 비록 대비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혜경궁과 효의왕후와 함께 ‘삼전(三殿)’으로 불리는 등 실질적으로는 대비의 대우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1822년(순조 22) 53세의 나이로 박수빈은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순조 22년 12월 26일, 순조 23년 2월 3일] 원호(園號)는 휘경(徽慶)으로 하였으며, 시호는 현목이라 하였는데, 행실이 중외에 드러남을 현이라 하고,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간직하는 것을 목이라 한다.[『순조실록』순조 22년 12월 29일]

성품과 일화

박수빈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검소한 생활을 하였기에 현빈(賢嬪)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효의왕후가 낳지 못한 아들을 낳고, 그 후에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후에도 효의왕후를 깍듯이 모셨으며, 나인이 의복을 만들 때 작은 천 조각을 버리자 크게 꾸중을 한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순조실록』순조 23년 2월 3일] 또한 자신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뇌물을 바치며 청탁을 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이를 고발하여 뇌물을 청탁한 이들이 의금부에 잡혀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올곧고 조용한 성품을 가진 덕에 박수빈은 정조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박수빈의 어머니인 원주 원씨가 그를 가졌을 때 꿈에서 한 노인으로부터 구슬을 받았는데, 그 구슬의 광채가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박수빈은 어려서부터 남달라서 어린 시절 뜰에서 언니들과 놀던 어느 날 호랑이가 뜰에 들어오자, 언니들은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울었으나 박수빈은 침착하게 방에 걸어 들어갔다는 일화도 있다.[『순조실록』순조 23년 2월 3일]

묘소와 후손

박수빈이 세상을 떠난 후 이듬해인 1823년(순조 23) 2월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아래로 묘역인 휘경원(徽慶園)을 결정하고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해당한다.[『순조실록』순조 23년 2월 3일, 순조 23년 2월 26일] 그 후 1855년(철종 6) 휘경원이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천장(遷葬)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0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내각리에 있는 선조(宣祖)의 후궁 김인빈(金仁嬪)의 묘소인 순강원(順康園)으로 휘경원을 옮겼다.[『철종실록(哲宗實錄)』철종 6년 1월 18일, 철종 6년 10월 6일, 철종 7년 4월 10일] 그러나 그로부터 8년 후인 1863년(철종 14)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또 한 번 휘경원을 천장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5월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로 천장을 하였다.[『철종실록』철종 14년 2월 7일, 철종 14년 5월 8일] 현재 휘경원에는 봉분과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그리고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 등이 있다. 정자각 앞에 있는 묘비의 비명(碑名)은 ‘유명조선국현목수빈휘경원(有明朝鮮國顯穆綏嬪徽慶園)’이다. 한편 휘경원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박수빈의 사당은 1824년(순조 24) 서울의 북쪽인 양덕방(陽德坊), 현재의 계동에 지었으며, 경우궁(景祐宮)이라 하였다.[『순조실록』순조 24년 12월 1일] 이는 박수빈이 임금의 생모라고 하더라도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기 때문에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서 별묘(別廟)를 지어 따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70년(고종 7) 김영빈(金寧嬪)과 윤화빈(尹和嬪)의 신주를 경우궁에 함께 모셨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7년 2월 26일] 그런데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하면서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등을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이 곧 실패로 돌아가면서 고종은 이재원(李載元)의 집을 거쳐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인 1885년(고종 22) 경우궁이 역적 무리들에게 더럽혀졌다며 경우궁을 이동하도록 명하였다.[『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8일, 고종 22년 12월 26일] 이에 1886년(고종 23) 5월 인왕동, 현재의 옥인동으로 경우궁을 옮겼다.[『고종실록』고종 23년 5월 28일, 고종 23년 5월 30일]

한편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경우궁의 신주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등과 함께 육상궁으로 옮겨졌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이어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박수빈은 정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은 순조이고, 1793년(정조 17)에 태어난 1녀는 숙선옹주로 영명위(永明尉)홍현주(洪顯周)와 혼인하였다.[『순조실록』순조 4년 4월 9일, 순조 4년 5월 27일]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대전회통(大典會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두산백과』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관직명사전』
  • 이경재, 『한양이야기』, 가람기획, 2003
  • 이기백, 『한글판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9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