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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옹주(敬愼翁主)는 태종과 안선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안선빈은 궁인으로 입궁하였다가 태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1421년(세종 3) [[숙선옹주(淑善翁主)]]로 책봉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05011_003 『세종실록』 3년 5월 11일]) 이는 조선 초기에는 임금의 서녀뿐만 아니라 후궁과 공신의 어머니와 아내 등을 두루 옹주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430년(세종 12) 경신옹주는 이공전(李恭全)의 아들인 이완과 혼인하였고, 부마 이완은 전의군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10028_002 『세종실록』 12년 10월 28일]) | 경신옹주(敬愼翁主)는 태종과 안선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안선빈은 궁인으로 입궁하였다가 태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1421년(세종 3) [[숙선옹주(淑善翁主)]]로 책봉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05011_003 『세종실록』 3년 5월 11일]) 이는 조선 초기에는 임금의 서녀뿐만 아니라 후궁과 공신의 어머니와 아내 등을 두루 옹주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430년(세종 12) 경신옹주는 이공전(李恭全)의 아들인 이완과 혼인하였고, 부마 이완은 전의군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10028_002 『세종실록』 12년 10월 28일]) | ||
− | 경신옹주와 그의 가족들은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켜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1443년(세종 25) 경신옹주의 5남 이의충( | + | 경신옹주와 그의 가족들은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켜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1443년(세종 25) 경신옹주의 5남 이의충(李義忠)이 9살 되던 해에 이웃에 사는 사노 [[석류(石榴)]]의 11살짜리 아들 석사민(石思敏)과 장난치며 놀다가 사민에게 욕을 먹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경신옹주의 종이 사람을 시켜 잡아들이자, 석류의 딸 석구장(石仇莊)이 경신옹주를 나무라며 나쁜 말로 욕을 하였다. 이를 들은 부마 이완이 화가 나서 장수(長守)와 덕생(德生)을 시켜 석류를 잡아다가 결박하고 형장을 쳤는데, 6일 만에 석류가 죽으면서 이완은 의금부에 갇히고 [[국문(鞫問)]]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5008_004 『세종실록』 25년 5월 8일]) 이때 이완은 고신을 빼앗기고, 충청도 진천현(鎭川縣)으로 귀양을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5014_004 『세종실록』 25년 5월 14일]) 이러한 가벼운 처벌에 대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를 올리며 반대를 하였지만, 경신옹주의 배다른 오빠인 세종(世宗)은 수용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5025_003 『세종실록』 25년 5월 25일]) 그리고 1445년(세종 27) 세종은 경신옹주의 부마인 이완의 고신을 다시 돌려주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2012_004 『세종실록』 27년 2월 12일]) |
− | 또 송사에도 휘말렸는데, 경신옹주의 4남인 [[부직장(副直長)]]이제충(李悌忠)은 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 그러나 이제충은 일찍 죽었고, 이후 그의 아내 이씨( | + | 또 송사에도 휘말렸는데, 경신옹주의 4남인 [[부직장(副直長)]]이제충(李悌忠)은 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 그러나 이제충은 일찍 죽었고, 이후 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황효원의 아내와 친밀하게 지내다가, 자신의 딸과 황효원의 서자를 혼인시키며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황효원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황효원의 [[비첩(婢妾)]]은 시기 및 이간질을 하며 이제충의 아내 이씨와 왕래를 끊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두 집은 원수가 되어 서로 다투어 헐뜯게 되면서 황효원은 자신의 며느리인 이제충의 딸을 내쫓았다. 이에 경신옹주는 세조(世祖)에게 상서(上書)하였고, 세조는 그 소송을 [[사헌부(司憲府)]]에 회부한 다음 형조로 하여금 일의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309021_008 『세조실록』 13년 9월 21일]) |
이 외에도 1468년(세조 14) 경신옹주는 어머니 숙선옹주와 노비 분배 문제로 송사를 다투었는데, 결국 숙선옹주는 세조에게 상서하여 딸인 경신옹주의 불효를 호소하였다. 이에 세조는 의금부에 명하여 경신옹주의 아들과 노비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신옹주의 녹봉을 빼앗은 후, 장남 이효충(李孝忠)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외방(外方)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경신옹주의 거집노비(據執奴婢)와 토전(土田) 및 [[문권(文券)]]은 숙선옹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406014_002 『세조실록』 14년 6월 14일]) 얼마 후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경신옹주는 그 해에 녹봉을 다시 돌려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10006_001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 이 외에도 1468년(세조 14) 경신옹주는 어머니 숙선옹주와 노비 분배 문제로 송사를 다투었는데, 결국 숙선옹주는 세조에게 상서하여 딸인 경신옹주의 불효를 호소하였다. 이에 세조는 의금부에 명하여 경신옹주의 아들과 노비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신옹주의 녹봉을 빼앗은 후, 장남 이효충(李孝忠)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외방(外方)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경신옹주의 거집노비(據執奴婢)와 토전(土田) 및 [[문권(文券)]]은 숙선옹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406014_002 『세조실록』 14년 6월 14일]) 얼마 후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경신옹주는 그 해에 녹봉을 다시 돌려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10006_001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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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고령에 있다. | 경신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고령에 있다. | ||
− | 경신옹주는 이완과의 사이에 6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이효충(李孝忠), 2남은 이신충(李信忠), 3남은 이예충(李禮忠)이며 4남은 이제충, 5남은 이의충, 6남은 이경충( | + | 경신옹주는 이완과의 사이에 6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이효충(李孝忠), 2남은 이신충(李信忠), 3남은 이예충(李禮忠)이며 4남은 이제충, 5남은 이의충, 6남은 이경충(李敬忠)이다. 그리고 1녀는 강자정(姜子正)과 결혼하였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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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신옹주 |
한글표제 | 경신옹주 |
한자표제 | 敬愼翁主 |
분야 | 왕족/옹주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종~예종 |
집필자 | 정주영 |
봉작 | 경신옹주(敬愼翁主)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고령 |
증조부 | 환조(桓祖) |
조부 | 태조(太祖) |
부 | 태종(太宗) |
모_외조 | 안선빈(安善嬪) |
형제 | (동생)익녕군(益寧君) (언니)소숙옹주(昭淑翁主) |
자녀 | (1남)이효충(李孝忠) (2남)이신충(李信忠) (3남)이예충(李禮忠) (4남)이제충(李悌忠) (5남)이의충(李義忠) (6남)이경충(李敬忠) (1녀)강자정(姜子正)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신옹주(敬愼翁主)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년 5월 11일, 『세종실록』 12년 10월 28일, 『세종실록』 25년 5월 8일, 『세종실록』 25년 5월 14일, 『세종실록』 25년 5월 25일, 『세종실록』 27년 2월 12일, 『세조실록』 13년 9월 21일, 『세조실록』 14년 6월 14일,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세조실록』 14년 6월 14일 |
총론
[?~? = ?].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太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검교(檢校)한성윤(漢城尹)안의(安義)의 딸인 안선빈(安善嬪)이다. 친동생은 익녕군(益寧君)이며, 친언니는 소숙옹주(昭淑翁主)이다. 부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전의군(全義君)이완(李梡)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경신옹주(敬愼翁主)는 태종과 안선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안선빈은 궁인으로 입궁하였다가 태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1421년(세종 3) 숙선옹주(淑善翁主)로 책봉되었다.(『세종실록』 3년 5월 11일) 이는 조선 초기에는 임금의 서녀뿐만 아니라 후궁과 공신의 어머니와 아내 등을 두루 옹주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430년(세종 12) 경신옹주는 이공전(李恭全)의 아들인 이완과 혼인하였고, 부마 이완은 전의군에 봉해졌다.(『세종실록』 12년 10월 28일)
경신옹주와 그의 가족들은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켜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1443년(세종 25) 경신옹주의 5남 이의충(李義忠)이 9살 되던 해에 이웃에 사는 사노 석류(石榴)의 11살짜리 아들 석사민(石思敏)과 장난치며 놀다가 사민에게 욕을 먹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경신옹주의 종이 사람을 시켜 잡아들이자, 석류의 딸 석구장(石仇莊)이 경신옹주를 나무라며 나쁜 말로 욕을 하였다. 이를 들은 부마 이완이 화가 나서 장수(長守)와 덕생(德生)을 시켜 석류를 잡아다가 결박하고 형장을 쳤는데, 6일 만에 석류가 죽으면서 이완은 의금부에 갇히고 국문(鞫問)을 받았다.(『세종실록』 25년 5월 8일) 이때 이완은 고신을 빼앗기고, 충청도 진천현(鎭川縣)으로 귀양을 갔다.(『세종실록』 25년 5월 14일) 이러한 가벼운 처벌에 대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를 올리며 반대를 하였지만, 경신옹주의 배다른 오빠인 세종(世宗)은 수용하지 않았다.(『세종실록』 25년 5월 25일) 그리고 1445년(세종 27) 세종은 경신옹주의 부마인 이완의 고신을 다시 돌려주게 하였다.(『세종실록』 27년 2월 12일)
또 송사에도 휘말렸는데, 경신옹주의 4남인 부직장(副直長)이제충(李悌忠)은 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 그러나 이제충은 일찍 죽었고, 이후 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황효원의 아내와 친밀하게 지내다가, 자신의 딸과 황효원의 서자를 혼인시키며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황효원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황효원의 비첩(婢妾)은 시기 및 이간질을 하며 이제충의 아내 이씨와 왕래를 끊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두 집은 원수가 되어 서로 다투어 헐뜯게 되면서 황효원은 자신의 며느리인 이제충의 딸을 내쫓았다. 이에 경신옹주는 세조(世祖)에게 상서(上書)하였고, 세조는 그 소송을 사헌부(司憲府)에 회부한 다음 형조로 하여금 일의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3년 9월 21일)
이 외에도 1468년(세조 14) 경신옹주는 어머니 숙선옹주와 노비 분배 문제로 송사를 다투었는데, 결국 숙선옹주는 세조에게 상서하여 딸인 경신옹주의 불효를 호소하였다. 이에 세조는 의금부에 명하여 경신옹주의 아들과 노비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신옹주의 녹봉을 빼앗은 후, 장남 이효충(李孝忠)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외방(外方)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경신옹주의 거집노비(據執奴婢)와 토전(土田) 및 문권(文券)은 숙선옹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세조실록』 14년 6월 14일) 얼마 후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경신옹주는 그 해에 녹봉을 다시 돌려받았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경신옹주는 친동생 익녕군의 아내인 운봉 박씨(雲峰朴氏)와도 갈등이 있었다. 어머니 숙선옹주의 탕약은 늘 경신옹주가 준비하였는데, 어느 날 숙선옹주가 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에 가니 이미 익녕군의 아내 운봉 박씨가 모시고 있었다. 이후 경신옹주가 사람을 보내어 병세를 물으면 운봉 박씨는 싫어하는 티를 내며 괜찮다고 말하였고, 숙선옹주가 세상을 떠난 후 경신옹주가 장례에 참여하려고 하자 운봉 박씨가 이를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숙선옹주가 원래는 경신옹주의 불효를 주장하지 않았는데, 병이 위독해지면서 갑자기 주장하며 세조에게 상서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전한다.(『세조실록』 14년 6월 14일)
묘소 및 후손
경신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고령에 있다.
경신옹주는 이완과의 사이에 6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이효충(李孝忠), 2남은 이신충(李信忠), 3남은 이예충(李禮忠)이며 4남은 이제충, 5남은 이의충, 6남은 이경충(李敬忠)이다. 그리고 1녀는 강자정(姜子正)과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