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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안산과 여주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된 교우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홍익만은 그해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2026_001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안산과 여주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된 교우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홍익만은 그해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2026_001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
2018년 1월 9일 (화) 22: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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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익만 |
한글표제 | 홍익만 |
한자표제 | 洪翼萬 |
분야 | 천주교도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영조~순조 |
집필자 | 홍연주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801년(순조 1) 12월 26일 |
본관 | 남양(南陽)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홍경렴(洪景濂) |
조부 | 홍상빈(洪尙賓) |
부 | 홍첨(洪瞻) |
자녀 | (딸)홍필주(洪弼周)의 처, 이현(李鉉)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익만(洪翼萬)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
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안토니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첨(洪瞻)이고, 할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지낸 홍상빈(洪尙賓)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낸 홍경렴(洪景濂)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서울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홍익만(洪翼萬)은 경기도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정조 14)을 전후하여 한양 송현(松峴)으로 이주하였다. 그에 앞서 1785년(정조 9)경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어 김범우(金範禹)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은 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전개하였으나 제사 폐지만은 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 사위 홍필주(洪弼周)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가까운 신자들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사학징의(邪學懲義)』]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안산과 여주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된 교우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홍익만은 그해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