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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 | [1557년(명종12)~1592년(선조25) = 36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무신 · 의병장. 자는 문숙(文淑)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좌랑변열(邊悅)이고, 어머니 철성이씨( | + | [1557년(명종12)~1592년(선조25) = 36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무신 · 의병장. 자는 문숙(文淑)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좌랑변열(邊悅)이고, 어머니 철성이씨(鐵城李氏)는 병마사(兵馬使)이흔(李昕)의 딸이다. [[중추부(中樞府)]][[경력(經歷)]]변윤중(邊胤中)의 손자이고, 포도대장(捕盜大將)[[변협(邊協)]]의 조카이다. |
=='''선조 시대 활동'''== | =='''선조 시대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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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실패하고 과거를 포기하려다가 중부(仲父) 변협의 격려로 무예를 닦아 1585년(선조18)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에 임명되었다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을 안의 난민(亂民)들이 부고(府庫)를 부수고 관물(官物)을 약탈해 갔다. 이에 그들을 붙잡아 참수(斬首)하고 그 머리를 저자 네거리에 내걸어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켰으며, 전라도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왜군이 조선으로 침입하는 틈을 타서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점거(占據)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주장을 쓰지 않았다. 그때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정벌을 위하여 30만의 대군을 징발한 다음, 조선에 9부대 15만 명을 파견하고, 나머지 15만 명은 조선의 역습을 대비하여 대마도와 나고야 등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당시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고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문과에 실패하고 과거를 포기하려다가 중부(仲父) 변협의 격려로 무예를 닦아 1585년(선조18)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에 임명되었다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을 안의 난민(亂民)들이 부고(府庫)를 부수고 관물(官物)을 약탈해 갔다. 이에 그들을 붙잡아 참수(斬首)하고 그 머리를 저자 네거리에 내걸어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켰으며, 전라도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왜군이 조선으로 침입하는 틈을 타서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점거(占據)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주장을 쓰지 않았다. 그때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정벌을 위하여 30만의 대군을 징발한 다음, 조선에 9부대 15만 명을 파견하고, 나머지 15만 명은 조선의 역습을 대비하여 대마도와 나고야 등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당시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고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
− | 변응정은 적은 군사로 결사대를 조직한 다음, 바다 가운데 정박 중인 왜적의 함선을 몰래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광( | + | 변응정은 적은 군사로 결사대를 조직한 다음, 바다 가운데 정박 중인 왜적의 함선을 몰래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광(李洸)이 조정에 그의 전공에 대하여 치계(馳啓)하자, 선조는 그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처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나라를 회복하려면 오로지 충청도에 의지해야 하는데 왜적들이 금산을 점거하고 충청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먼저 금산의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조헌(趙憲)의 충청도 의병과 함께 금산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함께 행군하다가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 조헌은 약속한 기일에 전라도 군사가 도착하지 않자, 충청도 의병만을 이끌고 8월 18일에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조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어찌하여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도 기일을 위배하여 함께 죽지 못했다는 말인가?”라며 탄식하였다. |
− | 그는 다시 김제군수( | + | 그는 다시 김제군수(金堤郡守)정담(鄭湛)과 손을 잡고 군사를 합쳐서 금산의 왜적을 치기로 약속하였다. 1592년(선조25) 8월 27일 해남현령변응정은 김제군수정담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성 10리 밖에서 금산의 왜적과 크게 싸웠다. 곰티[態峙]에다 [[목책(木柵)]]을 설치한 다음에 왜적을 맞이하여 싸우니, 왜적을 죽이고 노획한 것이 수없이 많았다. 해가 질 무렵에 왜적의 대병력이 밀려오자, 우리 군사들이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 그는 단병(短兵)을 가지고 접전하다가 마침내 장렬하게 죽었다. 왜적도 그를 의롭게 여겨서,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朝鮮) 충간(忠肝) 의담(義膽)”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정담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래도 우리 군사들이 힘을 합하여 싸우고 물러나지 않자, 왜군은 금산성으로 돌아갔다. |
=='''성품과 일화'''== | =='''성품과 일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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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후손'''== | =='''묘소와 후손'''== | ||
− |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현감이식( | + |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현감이식(李軾)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변충범(邊忠範)은 무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고, 딸은 신여철(愼汝喆)의 처가 되었다. |
=='''관력, 행적'''== | =='''관력, 행적'''== |
2018년 1월 9일 (화) 22:4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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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변응정 |
한글표제 | 변응정 |
한자표제 | 邊應井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문숙(文淑) |
시호 | 충장(忠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7년(명종12) |
사망 | 1592년(선조25) |
본관 | 원주(原州)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변사겸(邊士謙) |
조부 | 변계윤(邊季胤) |
부 | 변열(邊悅) |
모_외조 | 철성이씨(鐵城李氏): 이흔(李昕)의 딸 |
처_장인 | 이씨(李氏): 이식(李軾)의 딸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변충범(邊忠範) (1녀)신여철(愼汝喆)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변응정(邊應井) |
총론
[1557년(명종12)~1592년(선조25) = 36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무신 · 의병장. 자는 문숙(文淑)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좌랑변열(邊悅)이고, 어머니 철성이씨(鐵城李氏)는 병마사(兵馬使)이흔(李昕)의 딸이다. 중추부(中樞府)경력(經歷)변윤중(邊胤中)의 손자이고, 포도대장(捕盜大將)변협(邊協)의 조카이다.
선조 시대 활동
문과에 실패하고 과거를 포기하려다가 중부(仲父) 변협의 격려로 무예를 닦아 1585년(선조18)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에 임명되었다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을 안의 난민(亂民)들이 부고(府庫)를 부수고 관물(官物)을 약탈해 갔다. 이에 그들을 붙잡아 참수(斬首)하고 그 머리를 저자 네거리에 내걸어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켰으며, 전라도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왜군이 조선으로 침입하는 틈을 타서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점거(占據)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주장을 쓰지 않았다. 그때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정벌을 위하여 30만의 대군을 징발한 다음, 조선에 9부대 15만 명을 파견하고, 나머지 15만 명은 조선의 역습을 대비하여 대마도와 나고야 등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당시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고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응정은 적은 군사로 결사대를 조직한 다음, 바다 가운데 정박 중인 왜적의 함선을 몰래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광(李洸)이 조정에 그의 전공에 대하여 치계(馳啓)하자, 선조는 그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처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나라를 회복하려면 오로지 충청도에 의지해야 하는데 왜적들이 금산을 점거하고 충청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먼저 금산의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조헌(趙憲)의 충청도 의병과 함께 금산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함께 행군하다가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 조헌은 약속한 기일에 전라도 군사가 도착하지 않자, 충청도 의병만을 이끌고 8월 18일에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조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어찌하여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도 기일을 위배하여 함께 죽지 못했다는 말인가?”라며 탄식하였다.
그는 다시 김제군수(金堤郡守)정담(鄭湛)과 손을 잡고 군사를 합쳐서 금산의 왜적을 치기로 약속하였다. 1592년(선조25) 8월 27일 해남현령변응정은 김제군수정담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성 10리 밖에서 금산의 왜적과 크게 싸웠다. 곰티[態峙]에다 목책(木柵)을 설치한 다음에 왜적을 맞이하여 싸우니, 왜적을 죽이고 노획한 것이 수없이 많았다. 해가 질 무렵에 왜적의 대병력이 밀려오자, 우리 군사들이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 그는 단병(短兵)을 가지고 접전하다가 마침내 장렬하게 죽었다. 왜적도 그를 의롭게 여겨서,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朝鮮) 충간(忠肝) 의담(義膽)”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정담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래도 우리 군사들이 힘을 합하여 싸우고 물러나지 않자, 왜군은 금산성으로 돌아갔다.
성품과 일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변응정은 서울에 있던 어머니와 두 아우에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서찰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던 옷과 손톱과 머리칼을 벤 것을 싸서 보내며, “내가 죽으면 이것으로써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는 부하들 단속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으나, 사졸들 어루만지기를 너그럽게 하고 항상 의기(義氣)로써 격려하였으므로, 군졸들은 즐거이 함께 싸우다가 죽기를 바라고 감히 등을 돌리는 자가 없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현감이식(李軾)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변충범(邊忠範)은 무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고, 딸은 신여철(愼汝喆)의 처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기재사초(寄齋史草)』
- 『서애집(西厓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우계집(牛溪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죽천집(竹泉集)』
- 『중봉집(重峰集)』
- 『초려집(草廬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