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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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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령포 |
한글표제 | 원령포 |
한자표제 | 圓領袍 |
상위어 | 포(袍) |
하위어 | 단령(團領) |
동의어 | 곤룡포(袞龍布) |
관련어 | 단자원령포(段子圓領袍), 아청곤룡원령포(鴉靑袞龍圓領袍), 아청색원령포(鴉靑色圓領袍), 흑원령포(黑圓領袍)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 |
집필자 | 윤양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령포(圓領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1년 3월 3일 |
둥근 옷깃이 달린 왕의 포(袍).
내용
원령포(圓領袍)는 고려 말인 1387년(고려 우왕 13) 명나라의 새로운 관복(官服) 제도에 따라 관복으로 채택되었다. 왕의 포의 둥근 깃을 원령(圓領)이라고 한 것에 반해 백관들의 둥근 깃은 단령(團領)이라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원령의 깃을 많이 파고 소매 또한 넓어지고 무를 뒤로 넘겨 뒷길에 고정시키고 고름을 달았다.
1545년(명종 즉위) 11월에 고명(誥命)을 받기 전 왕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복색에 대해 원령포와 곤룡포(袞龍袍) 중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오례의(五禮儀)』에는 원령포, 성종조(成宗朝)의 일기에는 곤룡포라 각각 기록되어 있으나[『명종실록』 즉위 11월 17일 3번째기사], 모두 익선관을 착용하므로 고명을 받기 전의 원령포는 곧 아청곤룡포(鴉靑圓領袍)를 의미한다. 흉례 때의 흑원령포는 길례 때의 곤룡포와 같은 것이었으며, 장사를 지낸 뒤 왕은 시사복(視事服)으로 흉배가 없는 무양흑원령포(無揚黑圓領袍)를 착용하였다.
용례
無揚赤色黑圓領袍 正合於素服中迎勑之禮(『효종실록』 1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