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덕전(輝德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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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세종과 세종 비 소헌왕후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왕과 왕후의 승하하는 시기는 대부분 다른데, 조선후기에는 각자 혼전을 설치하여 혼전명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왕후가 먼저 죽어 혼전이 설치되어 있으면, 왕이 승하하여 산릉에 시신을 매장하고 왕후의 신주가 있는 혼전에 함께 모셔 하나의 혼전을 사용하였다. 휘덕전의 경우 세종 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1446년(세종 28)에 죽어 혼전이 먼저 설치되었다(『세종실록』 28년 3월 30일). 4년이 지난 1450년(세종 32) 세종이 죽자 소헌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던 휘덕전에 세종의 신주도 함께 모셨다. 세종의 3년 상제가 끝난 후에는 종묘에 부묘되었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 보평청(報平廳) 자리에 있었던 세종 비 소헌왕후의 혼전이다.

변천 및 현황

1446년(세종 28) 3월 24일에 세종 비 소헌왕후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제택에서 죽자 수양대군의 제택 중 서쪽에 있는 건물에 빈소를 설치하였다. 산릉에 재궁을 묻고 창덕궁으로 반우(返虞)하여 창덕궁의 보평청에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모셨다. 이때 보평청에 조성된 혼전 명이 휘덕전이다.

처음 혼전으로 논의된 곳은 창덕궁 안에 위치한 의정부(議政府)와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제택이었다. 의정부는 건물이 오래되어 볼품이 없으니, 평원대군의 제택으로 선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평원대군의 제택 위치가 의금부(義禁府)와 가까워 죄수를 신문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 우려되었다. 만약에 평원대군의 제택에서 혼전 의례를 행한다면 의금부를 옮기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결국 대안으로 문소전(文昭殿)의 어실(御室)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곳 또한 문소전의 본전과 가까워 매번 삭망(朔望)이 되면 문소전에서는 음악이 연주되어 길제를 지낼 것이고, 어실에서는 흉례를 행하게 되니 이치에 맞지 않는 형세가 벌여질 것이었다. 고민 끝에 창덕궁의 보평청을 수리하여 혼전으로 꾸미도록 결정하였다.

원래 혼전은 산릉에 시신을 매장하고 22개월 동안 신주를 모시는 곳이었다. 그러나 소헌왕후의 경우는 배우자인 세종이 살아 있을 때 왕비가 죽었기 때문에 상제는 기년상으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설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소헌왕후의 신주는 상제가 끝난 후에도 종묘에 부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세종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칠 때까지 휘덕전은 궁궐에 남아 있었다.

소헌왕후가 죽고 4년이 지난 1450년 2월 17일에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세종실록』 32년 2월 17일). 빈전을 영응대군의 집에 차리고 6월 12일에 영릉(英陵)에 장례를 지냈다. 산릉에서 우주(虞主)를 모셔와 창덕궁 보평청에 마련된 휘덕전에 모셨다. 이날 휘덕전에서 세종의 초우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혼전 의례가 행해졌다. 1452년(문종 2) 2월 17일에 담제를 설행하여 3년상을 마쳤으며(『문종실록』 2년 2월 17일), 세종과 소헌왕후의 신주는 4월 9일에 종묘에 부묘되었다. 따라서 휘덕전은 소헌왕후의 신주를 모시기 시작한 1446년부터 세종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된 1452년 4월까지 창덕궁의 보평청에 설치되어 있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