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구(洪命耈)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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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명구 |
한글표제 | 홍명구 |
한자표제 | 洪命耈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원로(元老) |
호 | 나재(懶齋) |
봉작 | 남녕군(南寧君) |
시호 | 충렬(忠烈)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6(선조29) |
사망 | 1637년(인조15) 1월 28일 |
본관 | 남양(南陽)-당홍(唐洪)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여주(驪州) 이포리(梨浦里) |
증조부 | 홍춘경(洪春卿) |
조부 | 홍성민(洪聖民) |
부 | 홍서익(洪瑞翼) |
모_외조 |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종민(沈宗敏)의 딸 · 심광언(沈光彦)의 증손녀(曾孫女) |
형제 | (동생)홍명하(洪命夏) |
처_장인 | 평산신씨(平山申氏): 신감(申鑑)의 딸 |
자녀 | (1자)홍중보(洪重普)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명구(洪命耈) |
총론
[1596년(선조29)∼1637년(인조15) = 42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충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참의홍서익(洪瑞翼)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참찬익성군(翼城君)홍성민(洪聖民)의 손자이고, 영의정홍명하(洪命夏)의 형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9년(광해군11) 24세로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1620년(광해군12)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고 1621년(광해군13)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그때 인사 권한을 가진 사촌형이 좋은 직책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하였다. 형조 좌랑과 공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다. 마침 아버지 홍서익도 진위사(鎭慰使)에 임명되었으므로, 아버지의 진위사를 바꾸어 달라고 상소하였다가,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2)
인조 시대 활동
1625년(인조3) 병조 좌랑에 기용되어, 사간원 정언과 형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으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26년(인조4)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 동료들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제(喪制)가 지나치게 성대하였다고 논박하였다. 이어 평안도관찰사윤훤(尹暄)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선천(宣川)의 앞바다 가도(椵島)를 점령한 명(明)나라 도독(都督)모문룡(毛文龍)을 염탐하여 보고하였다. 인조가 그 보고서를 보고 어사(御史)로 차출하여, 가도로 피난 온 요동(遼東)의 유민(流民)들을 진휼하고 구제하는 일을 맡겼다. 또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에 실시된 호패법(號牌法)의 편부를 염찰하다가, “오랑캐 군사가 의주(義州)에 쳐들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평양으로 달려가서 평안도관찰사윤훤을 도와 후금(後金)의 군사를 맞이하여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1627년(인조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후금의 3만여 기병이 불과 며칠 만에 평양성 안으로 밀어닥치자 윤훤은 자폭(自爆)하려고 하였다. 홍명구가 만류하면서 “군사도 없이 텅 빈 성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무익한 짓입니다. 마땅히 잠시 산중에 들어가서 산속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야 합니다. 또 북관(北關)의 병사들이 며칠 안으로 와서 모일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한번 싸우고 그때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윤훤이 그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5) 이 사건으로 윤훤이 벌을 받게 되자 홍명구는 그를 위해 상소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얼마 후에 성균관 직강에 기용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1628년(인조6) 홍문관 수찬, 부교리, 교리를 역임하고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629년(인조7) 문신의 정시(庭試)에서 수석을 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630년(인조8)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33년(인조11) 좌부승지, 이조 참의, 우승지, 이조 참판을 차례로 맡았다. 이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임하였다. 1634년(인조12) 병조 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을 종묘에 부묘(祔廟)하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말이 간절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가 노여워했으나 죄를 주지는 않았다. 1635년(인조13)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남녕군(南寧君)에 봉해졌다.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자, 나라를 방어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그 방략(方略)을 조목별로 진달하였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병자호란의 김화 백전 전투
1636년(인조14) 12월 9일 청(淸)나라 태종 홍타지는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적보(賊報)를 들은 평안도관찰사홍명구는 자모성(慈母城)에 들어가서 수비하였으나 청나라 군사는 의주성과 평양성을 모두 피하고 바로 서울로 직행하여 10여 일만에 서울 근교에 육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명구는 휘하의 별장장훈(張壎) 등 2천여 기(騎)를 서울로 보내어 임금을 구원하게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한 인조 일행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자신이 포병(砲兵) 3천 명을 징발하여 먼저 떠나는 한편, 납서(蠟書)를 보내 평안도병마사유림(柳琳)에게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동행할 것을 재촉하였다. 마지못해 뒤따라오던 유림이 강동(江東)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전체 군사의 행진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홍명구는 그를 꾸짖고 진격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적을 만나 수백명을 죽이고 적에게 사로잡힌 우리나라 사람과 가축을 모두 구원하였다.
우리 군사가 본진을 백전산(柏田山)으로 옮겼을 때 적의 연합군 1만 기가 공격해 왔다. 그 형세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홍명구가 급히 병마사유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유림은 이에 응하지 않고 후퇴하였다.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많이 전사하자 홍명구는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부인(符印)을 꺼내 소리(小吏)에게 맡기면서 “나는 여기서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다. 네가 잘 간직해라.”라고 말하고, 어머니에게 영결(永訣)을 고(告)하는 글을 써 시종에게 주어 전하도록 하였다. 홍명구는 죽음을 결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는데, 이때가 1637년(인조15) 1월 28일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이에 감동한 선봉 이일원(李一元)이 유림과 힘을 합쳐 힘껏 싸워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싸움은 홍명구의 <김화백전 전투>와 김준룡(金俊龍)의 <광교(光敎) 전투>뿐이었다. 이 사실이 알게 된 인조는 “단지 이 한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로다.”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며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성품과 일화
홍명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며 따뜻하고 곧았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려고 힘썼으나, 집안에 있을 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웠다. 태어나면서부터 생김새가 단아하고 머리가 영리하여 예사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놀이와 독서를 하면서도 부모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막살이 할 때에는 밤낮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여막에서 거처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평생 동안 어머니를 온화한 얼굴색으로 모셨고, 동생 홍명하를 자기 몸처럼 아꼈다. 그가 나이 8세 때 시(詩)를 지었는데, 이를 보고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이 기특하게 여겼고, 현헌(玄軒)신흠(申欽)과 친척 어른 학곡(鶴谷)홍서봉(洪瑞鳳)도 모두 그가 장차 나라의 큰 그릇이 되리라고 칭찬하였다. 대간으로서 간언(諫言)할 때에도 남의 과실을 각박하게 논박하거나, 윗사람과 부닥쳐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직책을 맡아서 일을 할 때에는 즐겁게 일하였고, 일이 국가에 참으로 이로운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하였다. 지위가 귀하게 되어도 가난한 선비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는데, 무너진 집에서 해진 자리를 깔고 거친 음식을 먹고 살면서도 편안하게 여기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이포리(梨浦里) 선영(先塋)의 언덕에 있고,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청음집(淸陰集)』) 나중에 이조 판서 겸 홍문관 ·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강원도 김화의 충렬사(忠烈祀), 평안도 자산(慈山)의 의열사(義烈祀), 경기도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는 형조 참판신감(申鑑)의 딸로 자녀는 1남을 두었는데, 외아들 홍중보(洪重普)는 우의정을 지냈고 충익공(忠翼公)에 봉해졌다. 임제(林悌)는 『백호전서(白湖全書)』에서 홍명구가 순절한 곳에 「평안도순찰사홍명구충렬비(平安道巡察使洪命耈忠烈碑)」란 비와 비각이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백호전서(白湖全書)』
- 『상촌집(象村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