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본궁(咸興本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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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함흥의 운전사(雲田社)에 위치한 태조의 본궁.

개설

본궁은 국왕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살던 옛 집을 가리킨다. 본궁에 속한 토지와 노비는 국가 재정에 귀속되지 않고 내수사(內需司)에서 별도로 관리하였다. 함흥본궁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 지낸 거처인 잠저(潛邸)일 뿐 아니라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의 5대조와 그들의 비(妃)를 모신 사당으로 그 중요성이 높았다. 그러나 조선전기에 본궁의 제향은 무속이 거행하는 기은제(祈恩祭)라고 하여 비판을 받았고, 조선후기에는 내수사의 별차(別差)와 노비가 제향을 주관하는 것으로 문제가 되었다. 숙종과 영조 연간을 거치면서 왕실 발흥지로 함흥이 다시 부각됨에 따라 함흥본궁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그리고 함흥본궁의 제향은 정조대에 이르러 원묘(原廟)로 인정을 받아 사전(祀典)에 등재되었다.

위치 및 용도

함흥본궁은 함흥부 관할 관아에서 남쪽으로 15리, 즉 약 6㎞ 정도 떨어진 운전사에 있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애초 함흥의 도성 동남쪽에 있는 귀주동(歸州洞)에서 살다가 함흥본궁의 자리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조선 건국 후에 태조는 이곳에 본궁을 설치하였고, 4대 조상인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왕위에 물러나 북쪽에 올 때면 이곳에 거처하였다. 태조의 사후에는 그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위판이 이곳에 봉안되었다. 그러므로 함흥본궁은 태조의 잠저이면서 태조와 그의 선조를 모신 사당이었다.

변천 및 현황

함흥본궁의 제사는 애초 국가의 공식 제례인 사전에 포함되지 않고 내수사의 별차(別差)무격(巫覡)이 주관하였기 때문에 제향의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함흥본궁 관련 제향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중종대부터이다. 이때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함흥본궁의 제향을 ‘기은(祈恩)’으로 묘사하고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있다(『중종실록』 7년 2월 29일). 당시 신하들은 왕의 옷을 말 위에 덮고 국왕의 의장 깃발을 앞세우며 마을을 돌아다니는 기은의 모습을 언급하며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후 인조대에 한희설(韓希卨)이 본궁 제향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또 다시 논란이 되었다(『인조실록』 20년 9월 27일). 당시 한희설과 함흥 유생들은 본궁 제향이 내수사별차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고 내수사별차와 궁노(宮奴)가 각각 헌관과 집사를 맡아 선왕을 모욕한다고 비판하였다. 반면 내수사 관원들은 본궁 제향이 선왕 태조에 의해 거행된 것이라며 폐지를 반대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신위를 본궁에 봉안하는 문제로 본궁 폐지론이 다시 제기되었지만, 1695년(숙종 21)에 신덕왕후 위판이 본궁에 봉안되어 국가로부터 제향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숙종실록』 1년 4월 16일)(『숙종실록』 21년 12월 28일).

한편 숙종과 영조대를 지나면서 함흥 지역이 왕실의 발상지로 다시 관심을 받으면서 함흥본궁의 제향 역시 선왕의 유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내수사 중심의 본궁 제향이 국가 사전의 하나로 공인받은 것은 1791년(정조 15)부터이다. 이때 정조는 함흥본궁을 원묘의 하나로 간주하고 이전 법식을 가능한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지나친 부분들은 수정하여 『함흥본궁정례(咸興本宮定例)』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1795년(정조 19)에 기존의 정례를 수정 보완하여 『함흥본궁의식(咸興本宮儀式)』을 간인함으로써 본궁 제향은 국가의 공인 의례가 되었다.

함흥본궁에서 거행하는 제향은 삭망제(朔望祭), 별소제(別小祭), 별대제(別大祭), 5월의 태백제(太白祭), 1월과 9월의 야백제(夜白祭), 12월의 야흑제(夜黑祭)로 구분할 수 있다. 별소제는 2월의 춘절제(春節祭), 6월의 반행제(半行祭), 7월의 추절제(秋節祭), 8월의 산제(山祭)와 추석제(秋夕祭), 11월의 동절제(冬節祭), 동지의 다례(茶禮)가 있었다. 별대제는 1월, 4월, 10월에 거행하였다. 이 중에서 10월과 4월의 별대제가 중요하였다. 이때에 맞추어 궁궐의 내전(內殿)에서 의대(衣襨)와 향, 제수 등을 본궁으로 내려 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대제에서는 음악을 사용하였다. 한편 태백제, 야백제, 야흑제 등은 성수[星宿]에 대한 의례이다. 특히 태백제는 함흥본궁에 봉안된 국왕의 의장(儀仗)을 앞세워 근처 도연포에 마련된 제성단(祭星壇)에서 거행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생전에 왕이 된 것을 보답하기 위해 지낸 제사로 간주되었다. 야백제와 야흑제의 대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형태

함흥본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광해군 2)에 관찰사한준겸(韓浚謙)이 다시 건립하였다. 현전하는 본궁 건물을 살펴보면, 정전은 북북서에서 남남동을 바라다보는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세워졌다. 15칸의 정전에는 목조에서 태조까지의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셨을 뿐만 아니라 태조가 사용하던 활, 화살, 활집, 관과 의복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정전 앞쪽에 내삼문(內三門)이 있고, 정전의 동북쪽에 이안당(移安堂)이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에 정전은 이 이안당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안당 문 밖에 태조가 팠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고, 그 앞쪽에 제례를 주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내삼문 밖 마당엔 풍패루(豊沛樓)가 있고 그 앞쪽에 연못이 있다. 외삼문 밖에는 비각과 홍살문(紅箭門)이 보인다. 비각은 1612년(광해군 4)에 한준겸이 세운 하마비(下馬碑)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함흥본궁은 ‘함흥차사’라는 고사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태조가 왕자의 난 이후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에 거한 장소가 바로 이 함흥본궁이기 때문이다. 한편 함흥본궁의 정전 뒤편에 ‘수식송(手植松)’이라는 소나무가 서 있다. 이것은 태조가 잠저 시절에 직접 심은 소나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활을 쏠 때면 활을 걸어놓던 나무라서 사람들이 ‘괘궁송(掛弓松)’이라고 하였다. 세 그루의 나무 중 두 그루에는 잎이 무성한데, 한 그루는 말라 있다. 애초 소나무가 여섯 그루였는데, 1624년(인조 2)부터 네 그루는 말라죽고 두 그루만 잎을 피웠다고 한다.

참고문헌

  • 『북도각능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
  • 『북도능전도형(北道陵殿圖形)』
  •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
  • 『함흥본궁의식(咸興本宮儀式)』
  • 윤정, 「정조의 본궁 제의 정비와 중흥주 의식의 강화」, 『한국사연구』136, 2007.
  • 윤정, 「숙종대 신덕왕후 본궁 追祔 논의와 본궁 인식의 변화」, 『한국사학보』3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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