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여(腰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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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國喪)의 의장 행렬에서 혼백(魂帛), 어진(御眞), 복식(服飾), 책보(冊寶) 등을 옮기던 가마.

내용

요여는 4명이 운반하는 가마로 국상의 발인, 부묘(祔廟), 천장(遷葬), 어진(御眞)과 신주의 봉안 등을 위한 의장 행렬에서 혼백, 어진, 영정, 명기(名器), 복식, 책보 등을 옮겼다. 따라서 요여는 가마에 운반하는 물건에 따라서 혼백요여(魂帛腰輿), 명기요여(名器腰輿), 애책요여(哀冊腰輿), 책보요여(冊寶腰輿)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조선전기에는 종묘의 신주와 능침이 많지 않아서 어진을 봉안하는 일에 요여가 많이 이용되었다. 당시 선원전(璿源殿)이나 문소전(文昭殿)에 조종(祖宗)들의 어용(御容)을 요여로 봉심(奉審)하게 되면 반드시 내관(內官)이 운반하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국상을 비롯한 왕실 상장례를 거행할 때 요여의 숫자는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후대로 갈수록 선대왕의 숫자와 능침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요여의 모습은 의궤의 반차도와 『세종실록』 「오례」에 나타나고 있다. 그 형태는 대부분 유사한데 책보요여를 만드는 것을 예로 든다면, 먼저 지붕 모양을 만든 뒤 처마는 운두(雲頭)를 만들어, 아청색(鵝靑色)의 면포(綿布)를 덮어씌우고, 기둥 아래의 사방에는 정판(精板)을 설치하여 수파련(水波蓮)을 그리고, 3면에는 장자(障子)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가마의 안에는 붉은빛의 옻칠을 한 죽망(竹網)을 붙이고, 전면(前面)에는 분합(分闔)을 두었으며, 홍색과 녹색의 생초(生綃)를 사용하여 염의(簾衣)를 만들어서 드리우는 모습이었다. 명기와 복완(服玩)을 운반하는 요여도 책보요여와 외형은 동일하였는데, 다만 가마 사면의 종이 장자(障子)에 모란을 그리는 것이 상이하였다. 따라서 요여의 외양은 그 용도가 다르더라도 큰 차이는 없었으며, 색깔과 그림만 차이가 있었다.

용례

傳曰 予所乘肩輿過高 神御腰輿過卑 心實未安 然旣往不追 若事畢還安時 更勿如是 (『성종실록』 25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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