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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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등을 위한 가마 형태의 탈것.

개설

고려시대 국왕의 거가(車駕)는 정거가(正車駕)와 부거가(副車駕)로 구성되었는데, 정거가는 오로(五輅) 중의 하나인 상로(象輅)였고 부거가는 초요련(軺轑輦)과 평련(平輦)이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거가는 『세종실록』「오례」의 국왕 거가에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는 세조대의 변천을 거치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상로가 사라지고 연과 여(輿)만 규정되었는데, 연은 고려시대의 초요련을 계승한 가마였고 여는 고려시대의 평연을 계승한 가마였다.

연원 및 변천

전통시대 중국에서 황제를 위한 탈것을 거가라고 하였는데, 거가에는 오로(五輅)와 치거(輜車)가 있었다. 오로는 모두 말이 끄는 수레였음에 비해, 치거는 바퀴를 제거한 수레였다. 바퀴가 없기에 말이 끌기도 했지만 사람이 운반하기도 했다. 사람이 운반할 때 치거는 연(輦)이라고도 했는데 15명의 사람이 메었다고 한다. 즉 치거 또는 연은 예비용 탈것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황제가 오로를 타기 위해 이동하거나 또는 오로에서 내려 이동할 때 연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바퀴를 제거한 수레를 속거(屬車) 또는 이거(貳車)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오로는 황제의 거가를 대표하였고, 치거는 황제의 속거를 대표하였다. 오로는 거가를 대표하므로 정거가(正車駕)라 할 수 있고, 치거는 속거를 대표하므로 부거가(副車駕)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정거가와 부거가의 제도는 중국 역대 왕조에 적용되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의 이거는 구승(九乘)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아홉 나라를 평정한 후 아홉 나라의 이거를 통합하여 속거를 91승으로 늘렸다. 진시황이 타는 거가 즉 정거가는 6필의 말이 끌었고, 부거가는 4필의 말이 끌었다. 당나라 때에는 속거가 10종류 있었다. 명 황제의 거가 제도 역시 정거가와 부거가로 구성되었다. 예컨대 1405년(명 영락 3)에 재정비된 대가노부(大駕鹵簿)에 등장하는 판교(板轎), 보련(步輦), 대량보련(大凉步輦), 대마련(大馬輦), 소마련(小馬輦), 옥로(玉輅), 대로(大輅) 중에서 옥로는 정거가였고 나머지는 부거가였다.

이 같은 정거가와 부거가 제도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정거가는 오로 중의 하나인 상로였고 부거가는 초요련과 평련이었다. 고려시대의 상로는 붉은 칠을 하였고, 금으로 도금하고 은으로 치장하였으며 수레의 끝부분을 상아로 마무리하였다. 상로는 붉고 흰 자백마(赭白馬)가 끌었는데 6사(六祀)와 교묘(郊廟)에 이용하였다. 반면 초요련은 종려로 지붕을 하였고 붉은 칠을 하였는데 금으로 도금하고 청동으로 만든 용과 봉황으로 장식하였다. 초요련은 상원, 연등, 팔관회 등에 왕이 참여할 때 사용하였다. 평연은 초요련과 같으나 지붕이 없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거가는 『세종실록』「오례」의 국왕 거가에 계승되었다[『세종실록』오례 가례 여연(輿輦)] 하지만 이는 세조대의 변천을 거치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상로가 사라지고 연과 여만 규정되었는데, 연은 고려시대의 초요련을 계승한 가마였고 여는 고려시대의 평연을 계승한 가마였다.

형태

『국조오례의』가례 노부도설(鹵簿圖說)에는 국왕의 거가로 대연(大輦), 소연(小輦), 소여(小輿)의 세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대연과 소여는 왕비의 탈것이기도 했고 세자의 탈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연과 여 두 가지로 구성된 국왕 거가는 조선시대 내내 준수되었다. 대연과 소연은 명칭에서 나타나듯 기본적인 형태는 같고 규모에서 차이가 날 뿐이었다. 대연의 형태는 『세종실록』에 규정된 것이 거의 그대로 『국조오례의』에 계승되었는데, 구체적인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붉은색 바탕에 주홍으로 칠하고, 그림은 황금을 사용하며, 장식은 금을 새겨 넣은 쇠를 사용하였다. 좌우에 긴 들채가 있는데, 양쪽 끝에는 도금한 용두(龍頭)를 만들어 덮어씌웠다. 그 위에 긴 고리가 있고, 들채 아래에는 작은 장식 판자가 있는데, 빙 둘러 난간을 설치하였다. 들채의 한가운데 앞뒤에 가로로 댄 막대가 있는데, 네 모퉁이에는 각각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또 그 양쪽 옆에는 서로 가까이 각각 네모진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사면에 설치하였다. 모두 주홍으로 칠하고, 밖에는 황금을 써서 구름 속의 용을 그리고, 안에는 구름 속의 봉을 그렸다. 판자를 밑바닥에 깔고, 위에 지붕이 있는데, 형상은 점차로 아치로 둥그스름한 천장을 이루는 궁륭(穹窿) 모양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갔다. 지붕은 아청색(鴉靑色) 저사(紵絲)로 덮고, 속은 녹색 저사를 입혔다. 사면에는 빙 둘러 판자 처마를 설치했다. 위 처마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모양이 점차로 밖으로 향하여 기울어지는데, 황금으로 바르고 화초를 그리며, 아래 처마는 위로부터 바로 드리워져 아래로 내려오는데, 금으로 수파련(水波蓮)을 그렸다. 네 개의 들보는 주석으로 도금하여, 걸치는 추녀로 하고, 그 끝에는 금봉(金鳳)의 머리를 만드는데, 아가리에 둥근 고리가 있었다. 지붕 꼭대기는 주석으로 도금하고, 2층으로 호로병(葫蘆甁) 같은 꼭대기를 만들었다. 사면으로 빙 둘러 아청색 저사의 휘장을 드리우는데, 속은 붉은색 저사를 사용하며, 붉은색 노끈으로 처마 밑의 금 고리를 연달아 꿰어서, 때에 따라서 걷었다 폈다 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주렴을 사면에 드리우고, 녹색 실로 엮어서 거북이 문양을 만들고, 가에는 녹색 저사로 연(緣)을 둘렀다. 연의 중앙에는 주홍빛의 의자를 설치하고 발 받침대인 각답(脚踏)을 갖추어 어좌(御座)의 의자로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수레의 이용이 활발하였고, 그것이 왕실에도 영향을 끼쳐 조선초기까지는 왕의 거가에 상로라고 하는 수레가 이용되었다. 하지만 세조대의 변화를 거쳐 『국조오례의』에 상로가 사라짐으로써 왕의 거가는 가마인 연과 여로만 구성되었다. 이처럼 왕실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가마만 이용하면서 민간에서도 수레보다는 가마의 이용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가마문화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명집례(大明集禮)』
  • 『만기요람(萬機要覽)』
  • 『주례(周禮)』
  • 신명호, 「조선 초기 국왕의 車駕變化와 象輅, 輦」, 『동북아문화연구』30,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2.
  • 정연식, 「조선조의 탈것에 관한 연구」, 『역사와 현실』27, 한국사연구회, 1998.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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