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출(陞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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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을 승급시키거나 파출하던 인사제도.

개설

승출은 관직을 올리거나 또는 파직하는 것과 관련된 인사 관행이었다.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고과(考課)를 통해서 이루어지거나 직무와 관련되어 승출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승출은 관원의 포폄(褒貶)과 관련되어 이루어지는 관행이었다. 조선시대 중앙 관원은 그 관서의 당상관이나 제조(提調) 및 속아문을 거느린 육조(六曹)의 당상관이, 지방 관원은 그 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2차례 포폄을 행하여 등급을 매기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관원에 대한 승출이 이루어졌다.

승출과 관련된 사항은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포폄에서 열 번 모두 ‘상(上)’을 받은 관원은 상(賞)으로 1계(階)를 올려 주는데, 이때 만약 정3품 당하관의 품계를 가지고 있는 관원이라면 품계를 올리지 않고 관직을 올려 주었다. 또한 10번 고과에서 두 번의 ‘중(中)’을 받으면 녹봉을 지급받지 못하는 무록관(無祿官)에 임용하고, 세 번 ‘중’을 받으면 파직하였다. 그리고 다섯 번의 고과나 세 번의 고과, 두 번 고과에서 한 번이라도 ‘중’을 받은 자는 현직(現職)보다 높은 직을 줄 수 없으며 두 번 ‘중’을 받은 자는 파직되었다. 당상관인 수령은 한 번 ‘중’을 받으면 파직시키도록 규정되었다.

승출의 규정은 관서의 특성에 따라 기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내금위와 같은 무반직의 경우에는 시재(試才)를 통해서 승출하였고(『세종실록』 25년 11월 11일), 역승(驛丞)이나 찰방(察訪)은 죄수의 도망 숫자를 계산해서 승출하였으며(『세종실록』 26년 7월 23일), 의학습독관(醫學習讀官)은 병을 치료한 것과 약재 사용의 정확성 등을 고려해서 점수를 매겨 승출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8년 2월 14일).

그런데 승출의 실상을 보면 파출은 대개 규정에 따라 시행되었다. 그러나 승급은 정치 운영, 인사제도의 정상적인 운영 여부와 관련되어 태조대에서 문종대까지는 대개 규정에 따라 행해졌지만, 세조대 이후 특히 조선후기로 이행될수록 규정에 구애되지 않고 행해지는 경향이 점차로 증가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대부분의 관원은 1년에 두 차례의 도목(都目)에서 포폄하여 등제를 내리거나 올리며 이를 근거로 승출하였다. 그러나 일부 관원은 포폄을 하지 않아 승출의 기준이 없었는데, 이에 대한 미비점을 시정하려는 조치들이 조선전기부터 있었다. 사역원의 경우 조선초 한때 포폄과 승출의 법이 없어 관리들이 아프다면서 출근하지 않는 날이 많은 등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1443년(세종 25) 7월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병가(病暇) 일수를 제한하는 등의 제도를 정비하였다(『세종실록』 25년 7월 1일). 서연관이나 대간, 의정부의 낭청, 승정원의 주서 등도 역시 포폄의 규정이 없었으나, 1461년(세조 7) 12월 대간을 제외한 나머지 관원은 포폄의 대상에 포함시켜 승출하는 규정을 정비하였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경국대전』에 규정된 조항은 이후 『속대전』 단계에서 포폄과 관련하여 몇 가지 조항이 추가되었다. 장악원(掌樂院) 관원은 음악을 익히는 태도가 부지런한지 태만한지 여부로 승출하도록 하였고, 포폄 때 ‘중’의 성적을 받은 수령이 체직을 도모하면 파직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어 『대전회통』 단계에서는 의금부에서 취조한 뒤 법률이 적용되어 다시 관직에 붙여진 관원은 고과 때 그 죄과를 참작해서 출척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