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상(小方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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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大輿)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재궁(梓宮)이 놓이는 자리.

개설

대여는 중간 부분에 답판(踏板) 좌우에 각각 1개씩과 전후에 각각 1개씩을 설치한 후 정판(精板)과 승적목(承籍木)의 상면(上面)을 가지런하게 하고, 안에 작은 방상(方牀)을 설치하여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을 싣는 구조로 되어 있다. 소방상은 대여의 핵심적인 장치로 고갯길을 오르내리거나 도로가 평탄하지 않아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곳을 지나갈 때 재궁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소방상 현주에 설치한 횡목에 재궁을 매달아 상하로 요동치는 것을 최소화한 것이다.

연원 및 변천

주희(朱熹)는 대여를 만들 때 소방상을 반드시 갖춰야 할 것으로 강조하였다. 관을 옮길 때 시신이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소방상을 설치하여 항상 평형을 유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소방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중종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지만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章敬王后)의 견전(遣奠) 때에 관례대로 실과(實果)와 생물(生物)을 소방상 안에 놓았다는 사실에서 그 용도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는 않았다.

16세기 사림(士林)들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장례를 진행하려 하였고, 각종 장례 용품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하였다. 노수신(盧守愼)이 대여를 모방해서 소방상의 제도를 시험하였고, 정구(鄭逑)는 소방상 제도를 연구하여 선조(先祖)의 상여가 험한 산길을 무리 없이 운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장현광(張顯光) 역시 선고(先考)의 묘소를 이장할 때 소방상 제도와 도식(圖式)을 보고 목수에게 지시하여 견고하고 치밀하게 하였다고 하는 등 소방상에 대한 이해가 점점 발전하였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인조는 사대부의 발인(發引)에 소방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5년 5월 12일). 왕의 대여와 사대부의 상여에 구분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소방상은 왕실에서만 사용하게 되었고 소방상 제작 기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소방상이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완벽하지 못하다고 지적한 정약용(丁若鏞)은 평형을 유지하여 먼 거리로 운구(運柩)하려면 주자(朱子)의 소방상 제도를 자세히 연구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형태

소방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장방형의 나무틀을 만들어 네 모퉁이에 철판을 대고 못질을 하여 단단하게 고정한다. 나무틀 안에 널빤지 횡목(橫木) 4개를 가로질러 붙이고 그 위에 답판을 붙인다. 나무틀 중간에 현주(懸柱)를 좌우에 세워 구멍을 내서 가로 지르는 횡량(橫梁)을 끼워 넣는다. 또 모철(冒鐵)로 중간을 굽혀서 현주의 윗부분과 횡량의 구멍 아래까지 감싸고 쇠못으로 박고, 포철(抱鐵)로 중간을 굽혀서 현주의 아래 부분과 나무틀을 둘러싸서 쇠못으로 박아 단단하게 고정한다. 현주가 흔들리지 않게 현주 좌우에 용지(龍支)를 설치하여 소방상을 완성한다.

또 방상의 밖 좌우의 지대목 위에 덧댄 기둥을 세우는데 윗부분을 4촌으로 깎아서 볼록한 모양[凸]으로 만들어 대여의 들보[梁]에 넣도록 마련한다. 또 덧댄 기둥 아래쪽에 둥근 구멍을 파서 횡량이 들어가도록 마련한다. 덧댄 기둥 좌우에 지지목을 설치하고 그 옆에 사주(斜柱)를 설치한다. 대여의 들보를 덧댄 기둥 위에 설치하는데 양쪽 끝에 각각 네모진 구멍을 파서 덧댄 기둥의 볼록한 부분[凸處]이 들어가게 하여 대철(帶鐵)로 묶고 못질을 한다. 중간을 구획하여 양쪽에 철정(鐵釘)의 둥근 고리[圓環]를 매단다. 들보 위에 덮들보[加梁]를 붙여 쇠못으로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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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민속 관련 사항

1734년(영조 10)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과 숙명공주(淑明公主)의 묘를 천장(遷葬)할 때 영조는 호조(戶曹)에 명하여 돈 2,000냥과 포목(布木) 20동(同)을 내수사(內需司)에 보내어 소방상의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호조(戶曹) 판서(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너무 많다고 하자 반으로 줄여서 주라고 명하였다(『영조실록』 10년 3월 20일). 여기서 소방상은 상여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상당히 많은 제작비용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637년 인조가 소방상 사용을 금지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 어려운 사회 현실을 반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인조국장도감의궤(仁祖國葬都監儀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춘관통고(春官通考)』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