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역(劒水驛)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검수역 |
한글표제 | 검수역 |
한자표제 | 劒水驛 |
상위어 | 금교도(金郊道) |
동의어 | 검수참(劒水站) |
관련어 | 역도(驛道), 속역(屬驛), 절령도(岊嶺道), 황해도참로찰방(黃海道站路察訪), 절령역(岊嶺驛), 역졸(驛卒), 봉산군(鳳山郡), 자비령로(慈悲嶺路), 극성로(棘城路)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황해도 |
시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성주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검수역(劒水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년 8월 12일 |
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금교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검수역(劒水驛)은 고려전기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절령도(岊嶺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금교도(金郊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봉산군에 위치해 있었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절령도에 소속된 11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 지역인 봉주(鳳州)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1061년(고려 문종 15)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금교역(金郊驛)‧흥의역(興義驛)‧금암역(金巖驛)‧보산역(寶山驛)‧안성역(安城驛)‧용천역(龍泉驛)‧절령역(岊嶺驛)‧동선역(洞仙驛)‧경천역(敬天驛) 등과 함께 황해도참로찰방(黃海道站路察訪)에 속하였다.
조선초에는 험난한 자비령로(慈悲嶺路) 대신 평탄한 극성로(棘城路)의 이용이 잦아지면서 극성로상에 있는 검수역의 중요성 또한 부각되는데, 『세종실록』에는 검수참(劍水站)에 전운(轉運) 노비를 지급한 기록이 나타난다(『세종실록』 2년 8월 12일).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 금천군 조에 따르면, 검수역에는 역졸(驛卒) 32명과 역마(驛馬) 9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금교도(金郊道)의 속역이었다.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령역(岊嶺驛)을 폐지하여 검수역으로 옮겨 설치하였고, 금교도에 소속시켰다. 또한 검수참(劒水站)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의 역참 제도가 정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금교역‧흥의역‧금암역 등 10개 역과 더불어 금교도에 소속되었으며, 조선후기까지 금교도의 속역으로 존속하였다. 이후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검수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금천 고을 동쪽 30리 지점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여지도서』에는 옛 황해도 금천군 관아 동쪽 4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도 봉산군 산수면 용현리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교통로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6집, 2008.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