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암서원(興巖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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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숙종 28) 경상도 상주에 송준길(宋浚吉)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개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흥암서원 관련 기사는 2건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1716년(숙종 42) 서원에 어필 원액을 내리는 기사와 고종대 전국적인 서원 철폐가 단행될 때 존속한 47개소의 서원에 대한 기사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서원은 일반적으로 유현(儒賢)의 생장지와 독서강학처 등의 연고가 있는 곳에 건립하였다. 송준길도 세상을 떠난 후 충청도 지역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는데,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송준길은 김장생(金長生)으로 대표되는 서인-노론계 도학의 적전을 계승한 인물로 일찍이 추숭되어 왔다. 이처럼 충청도에 주로 분포했던 송준길 제향서원이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시기는 숙종대 후반이었다. 이 시기는 중앙 정국에서 노론(老論)이 집권 세력으로 그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남인(南人)의 근거지로 알려진 경상도 상주 지역에 송준길을 제향하는 서원을 건립하는 표면적인 명분은 이 지역이 처향(妻鄕)이라 왕래하는 과정에서 유풍 진작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거론하였다. 하지만, 흥암서원의 건립에는 자신들의 향촌기반을 강화하려던 영남 지역 노론 세력과 기호학맥을 더욱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던 충청도 지역 노론 세력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였다. 이러한 노론 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1682년(숙종 8) 이숙(李䎘)을 제향하는 대구 상덕사(尙德祠)와 1697년(숙종 23) 이이(李珥)와 김장생을 제향하는 청송의 병암서원(屛巖書院)의 건립을 통해 이미 나타났다.

흥암서원은 송준길를 제향하기 위해 1702년(숙종 28) 경상도 상주에 건립하였다.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은 상주 지역 노론의 대표 인물이었던 성만징(成晩徵)과 숙종 후반 노론의 산림이었던 권상하(權尙夏)였다. 성만징은 권상하의 고제를 뜻하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대 이후 상주 지역을 중심으로 서인계를 이끌던 인물이다. 성만징은 서원의 건립에 따른 제반 사항을 권상하와 협의하여 결정하였고, 서원이 완성되자 권상하에게 원장(院長)을 청하는 등 상호간에 긴밀히 연대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흥암서원의 조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흥암서원사실록(興巖書院事實錄)』을 들 수 있다. 경상도 지역 노론의 대표 서원으로 서원의 조직은 대체로 서인계 서원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원장(院長), 장의(掌議), 유사(有司)로 구성되었다. 원장은 권상하, 이의현(李宜顯), 유척기(兪拓基), 김양행(金亮行), 김이안(金履安), 이민보(李敏輔), 심환지(沈煥之) 등 당대의 노론 대신들이 추대되었고 장의는 2명으로 본향인 상주와 도내에서 각기 1명씩 선출하였다. 서원의 운영을 살필 수 있는 원규 등은 서인계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규약에서 많이 원용하였던 율곡이이가 찬한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와 「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를 기본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권상하와의 연대를 기반으로 성만징은 1705년(숙종 31) 서원 청액소를 올려 사액을 실현시켰다. 이후 성만징은 흥암서원을 노론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을 제향하는 대표적인 서원으로 충청도의 화양서원(華陽書院)에 비견하는 위상 확립을 통해 영남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노론 세력 간의 상호 제휴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론의 의도는 1716년(숙종 42) 10월 흥암서원에 어필 사액을 다시 받게 됨으로써 실현되었다[『숙종실록』42년 10월 14일 ]. 당시는 노·소론 간에 오래도록 대립해 왔던 회니시비(懷尼是非) 문제에 대해 숙종이 노론의 의리가 옳다고 판정한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렸던 때였다.

숙종은 병신처분의 후속 조치로 앞으로 더 이상 사설(邪說)의 발호를 그치게 하기 위해 송시열과 송준길을 제향하는 대표 서원인 화양서원과 흥암서원에 어서(御書)한 편액을 다시 내렸던 것이다. 노론의 명분 강화를 위한 정치적 조치로 인해 흥암서원은 영남 노론계의 구심점으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이후 흥암서원은 이를 바탕으로 김장생 및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 추진 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영남 지역 노론계 공론을 대변하였다. 이후 흥암서원은 송준길의 유일한 독향처라는 위상으로 인해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의의

흥암서원은 경상도 지역에서 노론을 대표하는 서원이라는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현전하는 자료들은 빈약하다. 『조선왕실록』에도 어필 사액 등에 대한 내용만이 수록되어 있어 서원의 정치적 위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서원 운영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료의 발굴이 필요한 실정이다.

참고문헌

  • 이수환, 『조선 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 김학수, 『17세기 영남학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