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옹주(孝靜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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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0년(중종 15)~1544년(중종 39) = 25세]. 조선의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후궁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이백선(李白先)의 딸인 이숙원(李淑媛)이다. 친언니는 정순옹주(貞順翁主)이다. 부마는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순원위(淳原尉)조의정(趙義貞)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효정옹주(孝靜翁主)는 1520년(중종 15) 중종과 이숙원의 사이에서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는데, 이 해에 어머니 이숙원이 세상을 떠났다. 1529년(중종 24)부터 중종은 혼기가 임박한 효정옹주의 집을 짓게 하였는데, 1532년(중종 27) 재변(災變)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헌부(司憲府)에서 영양군(永陽君)과 효정옹주의 집짓기를 정지하자고 건의하자, 중종은 장마 전에 건물을 보수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한 약간 명을 남겨 두고 모두 철수하게 하였다.(『중종실록』 27년 5월 17일) 이무렵 효정옹주는 순창 조씨(淳昌趙氏)조침(趙琛)의 아들 조의정(趙義貞)과 혼인하였는데, 부마 조의정은 순원위에 봉해졌다.

1544년(중종 39) 효정옹주는 아들 조천계(趙天啓)를 해산한 후 병세가 위독해졌는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중종은 즉시 의원과 의녀를 보내 진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착하기도 전에 효정옹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중종은 효정옹주의 위독함을 늦게 알린 정황이 수상하다며 부마 조의정을 수금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9년 2월 19일)

한편 효정옹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중종은 여자 문제 등으로 부마 조의정에 대한 불만이 많아서, 이에 대하여 질투를 하지 않는 딸을 매우 안쓰럽게 여겼다.(『중종실록』 39년 3월 17일) 결국 중종은 효정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조의정이 효정옹주의 여비(女婢)인 풍가이(豊加伊)를 첩으로 삼은 후 옹주의 거처를 비복(婢僕)처럼 대우하고 풍가이의 거처를 옹주처럼 대우하여 가도(家道)를 문란하게 하였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풍가이에 대해서는 효정옹주와는 종과 주인의 분수가 있는데, 조의정의 사랑을 믿고 항상 옹주를 능멸하고 거처를 문란케 하여 옹주를 소박 받게 하고 죽게까지 하였다며 의금부에서 추고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9년 2월 19일) 결국 조의정은 고신을 빼앗기고 원하는 곳에 부처하게 하였으며, 풍가이는 장 백 대를 맞고 풀려났다.(『중종실록』 39년 2월 23일),(『중종실록』 39년 3월 17일)

그리고 얼마 후 효정옹주의 이모로 당시 상궁이었던 은대(銀代)가 내수사(內需司)의 종들을 시켜 풍가이를 가두고 매를 때려 죽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사헌부 등에서는 은대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중종은 자기 집안의 종을 때린 일은 국가와 관계된 일이 아니며, 여자를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들을 들며 은대를 보호하였다.(『중종실록』 39년 6월 4일) 그러나 은대의 처벌을 주장하는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중종은 은대의 직첩을 거두고 문외로 방출하였다.(『중종실록』 39년 7월 6일) 그럼에도 은대에 대한 처벌 요구가 줄어들지 않자 중종은 결국 그를 대구로 유배 보냈다.(『중종실록』 39년 7월 6일),(『중종실록』 39년 7월 16일)

묘소 및 후손

효정옹주의 묘소는 양주(楊州) 해곡(海谷)에 있다.

효정옹주와 부마 조의정의 사이에서 1남 조천계를 두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