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주(洪敍疇)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99년(연산군5)∼1546년(명종1) = 48세]. 조선 중기 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도원(道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토홍(土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홍숙(洪淑)이고,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현령안극치(安克治)의 딸이다. 대호군홍귀연(洪貴演)의 손자이고, 영의정홍언필(洪彦弼)의 6촌 동생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1년(중종16) 23세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에 보임되었다. 1522년(중종17) 홍문관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정자 · 저작으로 승진하였다. 1523년(중종18)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으로 옮겼다. 1524년(중종19)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과 이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527년(중종22)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있을 때, 세자를 저주한 사건인 <작서(灼鼠)의 변(變)>이 일어났다.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는데, 홍서주의 아들 홍여(洪礪)가 경빈 박씨의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그도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때 중추부 영사정광필(鄭光弼)은 국문에 참여하였다가, 사건이 명백하지 못하다고 의심하며, 왕실의 지친(至親)을 고문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여 그들을 적극적으로 구원하였다. 그리하여 1528년(중종23) 중종은 이를 단순한 익명서(匿名書) 사건으로 처리하고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福城君)이미(李嵋)를 경빈의 친정인 경상도 상주(尙州)로 보냈다.

1529년(중종24) 홍서주가 의정부 검상이 되자, 상피법(相避法)에 의하여 그의 아버지 홍숙은 의정부 찬성에서 이조 판서로 옮겼다. 1530년(중종25) 이행(李荇) 등이 어명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35권을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55권으로 편찬하여 간행하였는데, 그때 그는 6촌 형 홍언필과 함께 편수에 참여하였다. 책의 서문(序文)에서 “종5품상 봉직랑 수의정부 검상 신 홍서주”라는 그의 이름과 직함을 볼 수 있다. 1532년(중종27) 김안로(金安老)가 좌의정심정(沈貞)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중, 심정이 경빈 박씨와 내통하여 복성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계획하였다고 무고하여, <복성군(福城君)의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에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사사되었고, 심정의 부자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당성위(唐城尉)홍여는 <작서의 변>이 일어났을 때, 장모 경빈 박씨의 사주로 세자를 저주하는 익명의 글을 썼다고 의심을 받았다. <복성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이 일로 혹독한 심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자복하지 않다가 장살(杖殺)되었는데, 그때 아직 약관의 나이가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홍서주는 전라도 무장(茂長)으로 귀양갔고, 아버지 홍숙은 고신을 박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되어 과천(果川)에서 은거하였다.

1538년(중종33) 홍숙이 75세의 나이로 돌아갔는데, 그는 유배지에 있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1541년(중종36) 유배지를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곧 석방되었다. 1543년(중종38)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가, 전한으로 승진하였고, 재상어사(災傷御史)로서 함경도의 재해 상황을 돌아보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고 우승지로 승진되었다. 1544년(중종39)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45년(중종40) 공조 참의 · 홍문관 전한을 거쳐,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 동안 건강을 해쳐, 1546년(명종1) 9월 3일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48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서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순박하고 근신하며 언어가 과묵(寡黙)하였다. 부유하고 귀한 집에서 성장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으나 조금도 교만한 기색이 없었다. 이리하여 친구들이 그를 높이 받들고 존경하였다. 1532년(중종27) <복성군의 옥사>에, 어린 아들은 비명에 횡사하고 그는 전라도 무장의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문을 닫은 채 손님을 사절하고 모든 허물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책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말이나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 홍숙과 어머니 안씨에게 혼정성신(昏定星辰)하지 못하는 것만을 한스러워하였다. 1538년(중종33) 유배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영위(靈位)를 설치하여 곡(哭)하고 전(奠)을 올리면서 슬퍼하다가 몸이 야위었는데, 거의 사람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석방되어 벼슬살이하는 동안에도 귀양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항상 병석에 누워 지냈다. 죽을 때 아들과 조카들에게 유언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어서 한스럽지 않다. 다만 나는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울도리(鬱陶里)홍숙의 무덤 아래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사위 민개(閔漑)의 부탁으로 창주(滄洲)윤춘년(尹春年)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종실 철성군(鐵城君)이갱(李鏗)의 딸인데,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홍여는 중종의 부마 당성위이고, 3남 홍애(洪磑)는 현감을 지냈으며 장녀는 사헌부 감찰민개의 처가 되었다. 홍애의 손자 홍익한(洪翼漢)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삼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청음집(淸陰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역사(海東繹史)』
  • 『규암집(圭菴集)』
  • 『간재집(艮齋集)』
  • 『용재집(容齋集)』
  • 『동각잡기(東閣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