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담(洪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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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담 |
한글표제 | 홍담 |
한자표제 | 洪曇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태허(太虛) |
시호 | 정효(貞孝)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09년(중종4) 1월 14일 |
사망 | 1576년(선조9) 9월 2일「비명」 1576년(선조9) 9월 3일『선조실록』 1576년(선조9) 9월 1일『선조수정실록』 |
본관 | 남양(南陽)-토홍(土洪)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남양부(南陽府) 청명산(晴明山) |
증조부 | 홍귀해(洪貴海) |
조부 | 홍형(洪泂) |
부 | 홍언광(洪彦光) |
모_외조 | 남원양씨(南原梁氏): 양윤(梁潤)의 딸 |
형제 | (동생)홍경(洪炅) |
처_장인 |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익수(曺益修)의 딸 |
자녀 | (1자)홍종복(洪宗福) (2자)홍종록(洪宗祿) (1녀)최덕순(崔德峋)의 처 (2녀)남황(南璜)의 처 (3녀)신종원(辛宗遠)의 처 (4녀)오억령(吳億齡)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담(洪曇) |
총론
[1509(중종4)∼1576(선조9) = 68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태허(太虛)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도총부 경력홍언광(洪彦光)이고,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는 맹산현감(孟山縣監)양윤(梁潤)의 딸이다. 우부승지홍형(洪泂)의 손자이고, 영의정홍언필(洪彦弼)의 조카이며 영의정홍섬(洪暹)의 4촌 동생이다. 청백리(淸白吏)로 선임되었고, 효자로 정문(旌門) 복호(復戶)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중종34) 31세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가, 1540년(중종35)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 · 저작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성균관 박사로 옮겼는데,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임하였다. 1542년(중종37) 홍문관 부수찬 · 수찬으로 승진하였으며,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다. 1543년(중종38)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과 이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1) 예조 정랑과 공조 정랑을 역임하였고, 춘추관 사관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조 정랑과 의정부 사인을 거쳐 1547년(명종2) 사헌부 장령, 장악원 첨정, 홍문관 응교를 차례로 맡았다. 1548년(명종3)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가, 군기시 부정을 거쳐, 사재감 정으로 승진하였고, 태복시 정으로 옮겼다. 이어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는데 1549년(명종4) 직언을 하다가 시의(時議)에 거슬려 예빈시 부정으로 좌천되었다.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다가 1550년(명종5) 예문관 직제학으로 승진하였고, 승정원의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551년(명종6) 우부승지 · 우승지로 옮겼다. 이때, 왕명으로 특별히 선발한 청렴한 관리 33인에 뽑혔고(『국조보감(國朝寶鑑)』 권22) 1552년(명종7) 청백리로 뽑힌 19인에게 명종이 베푼 연회에도 참석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9) 이 해에 좌승지가 되었고 다음해 도승지에 영전되었다. 승지로 있을 때, 명종의 친경(親耕)에 집사 노릇을 한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윤원형(尹元衡)이 그를 꺼렸으므로,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54년(명종9)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가 1555년(명종10)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과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사은사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온 다음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556년(명종11)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다. 홍담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조식(曺植)이 상소하여 “선비들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흰색의 옷을 입게 되면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라는 말을 하자, 그는 선비들이 겉옷으로 흰색 옷을 입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연분홍빛을 입게 하였다. 그러나 불평이 많아 5~6년 만에 중지하였다.(『문소만록(聞韶漫錄)』참조) 1557년(명종12)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동지사로 옮겼고, 1558년(명종13)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559년(명종14)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대사간으로 옮겼다. 그 후에 그는 대사헌을 네번 지내고 대사간을 한번 지내면서 관리의 풍기를 규찰하여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1560년(명종15) 이량(李樑)의 배척으로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61년(명종16)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이량이 그를 배척해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좌천되었다. 당시 명종은 자신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량을 끌어들였다. 이량과 윤원형이 권력 투쟁을 하였을 때, 홍담은 중립을 지켰으므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1564년(명종19)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도승지로 발탁되었고, 공조 참판과 이조 참판을 거쳐,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20)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67년(명종22)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어, 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그가 함경도관찰사로 있다가 돌아올 때 짐바리와 종복이 간략하여 감영의 아전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1)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경연 동지사와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겸임하다가 1569년(선조2) 이조 판서로 옮겼다. 본래 요직에 오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홍담은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으나 곧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형조 판서로 옮겼는데, 형조에서 묵은 옥사(獄事)를 처리하고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1574년(선조7) 계모(繼母)의 상(喪)을 끝마치자,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다시 병조 판서로 옮겼다가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575년(선조8) 인순왕후의 상을 당하여 빈전도감(殯殿都監)제조(提調)가 되어 밤낮으로 일을 돌보다가 몸이 많이 상하였다. 의정부 좌참찬으로 영전하였을 때 4촌 형 홍섬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므로, 피혐(避嫌)해서 중추부 지사로 옮겼다가, 의금부 지사가 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3) 1576년(선조9)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병중에 우참찬과 좌참찬에 다시 임명되었다. 1576년(선조9) 9월 2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8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겉으로는 간결하고 중후하였으나, 실제로는 명민하고 강직하였다. 남과 교유(交遊)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젊은 선비들이 정통 도학(道學)을 하는 ‘진유(眞儒)’라고 자처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서, 자제들에게는 “집에 들어와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 남을 공경하며, 말을 신중히 하고 자기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 바로 학문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일에 힘쓰지도 않는 것은 진실을 버리고 부화(浮華)에 힘쓰는 것이다.”라고 늘 훈계하였다. 몸가짐이 검소하고 청렴하며, 지조가 있고 자신에 넘쳤다. 일 처리가 정밀하고 약속한 바를 반드시 실행하였으며, 나랏일을 집안일처럼 걱정하였다. 직무를 맡아볼 때에는 임금 앞에서도 서슴없이 직언하였고, 시의에 따라 뜻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훼예(毁譽)에 따라 말을 바꾸지 않았다. 스스로 신념을 굳게 지켰으나, 신진 사림파로부터는 “고집스럽고 편협하였다.”, “넓고 큰 도량은 없었다.”라는 비난받았다. 그는 효도하는 마음이 남달라서 계모 이씨를 섬기면서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동생 홍경(洪炅)을 한 몸처럼 돌보고 한 집에 같이 살았다. 죽은 뒤에 이웃 사람들이 그의 효행과 우애를 나라에 알리자, 나라에서 그 집에 정문을 세웠다.
명종 때 진복창(陳復昌)과 함께 홍문관에 재임하고 있었는데, 진복창이 윤원형에 붙어 사람들을 중상모략을 하자, 그는 이를 적극 막았다. 홍담은 김개(金鎧)와 함께 훈구파의 거두로 사림파의 신진 세력과 대립하였는데, 진유를 자처하는 신진 사류들에 대해 “지금 세상에 무슨 진유가 나올 것인가. 지금 자신이 학문했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거짓이다. 만약 진유가 있다면 마땅히 그를 존경해야 할 터인데, 어찌 내가 감히 그를 헐뜯겠는가?”라고 말하며 탐탁해 하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부(南陽府) 서쪽 청명산(晴明山) 홍법동(弘法洞)의 언덕에 있는데, 진원군(晉原君)유근(柳根)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서경집(西坰集)』 권7) 부인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조익수(曺益修)의 딸로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홍종복(洪宗福)은 증 호조 판서이고, 차남 홍종록(洪宗祿)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손자 홍희(洪熹)는 세자시강원 사부와 돈녕부 동지사를 지냈고, 홍헌(洪憲)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서경집(西坰集)』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
- 『문소만록(聞韶漫錄)』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