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彗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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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빗자루[彗]와 같다 하여 혜성(彗星)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출몰 주기가 일정치 않아 규칙성을 찾기 어려운 까닭에 불길한 객성의 일종으로 간주한 천체.

개설

혜성은 그 형체가 앞은 둥글고 뒤는 기다란 꼬리 모양을 하는 까닭에 고대로부터 빗자루 형상에 비유하였으며, 이것이 이 별의 이름이 되었다. 우리말로 ‘살별’이라 하는데 이때의 살은 빗자루의 살을 의미한다. 현대 천문학에서 혜성은 가스와 먼지, 얼음으로 구성된 천체의 일종으로 파악되었으며, 이심율이 큰 타원궤도 또는 포물선궤도를 그리며 공전하는 태양계의 한 일원이다. 태양에 접근하면서 혜성의 핵 표면에 있던 기체와 얼음 등이 증발하면서 태양 반대편으로 길게 꼬리를 형성한다.

내용 및 특징

살별의 살은 부채살, 바퀴살과 같이 중심점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펼쳐지는 형태에 주로 붙이는 말이며, 빗살 무늬, 빛살 등도 그런 예이다. 고대 중국에서 꼬리가 긴 빗자루 형상의 별을 혜성이라 하였고, 다른 말로 소성(掃星)이라 하는 것도 역시 빗자루로 쓴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이런 형상에서 유추된 의미가 곧바로 혜성의 뜻이 되었는데, 조선후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위선지(魏鮮志)」에서 혜성은 소제(掃除)를 주관하여 옛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편다고 보았고, 혜성의 본체는 본래 빛이 없고 태양을 빌려 빛을 내는 까닭에 저녁에 나타날 때는 동쪽을 가리키고 새벽에 나타나면 서쪽을 가리킨다고 파악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혜성을 전반적으로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고 있다. 불규칙하게 궤선을 그리는 혜성의 출현이 마치 빗자루로 묵은 것을 청소하고 새것을 맞이하는 소구영신(掃舊迎新)의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유자광(柳子光)이 남이(南怡)의 역모 사실을 고변할 때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혜성 출현에 관한 대목이다. 입직하던 남이 장군이 병조 참지 유자광 집에 달려와서, 혜성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고, 이제 혜성이 은하수인 천하(天河) 속에 있어서 그 별빛이 하야므로 쉽게 볼 수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찾아보면, 광망(光芒)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쳐 큰 병란이 생긴다고 하였다면서 이 말을 역모의 의도로 몰아갔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이렇게 혜성을 두고 이른 말을 당시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예종조에 반하는 역모 혐의로 덮어씌웠고 이 옥사로 당시 26세였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혜성의 천변을 단지 자연의 법칙 정도로만 파악하려는 경향이 동시에 보인다. 『자치통감속편절요(資治通鑑續編切要)』 중 송 태조기를 강독하였는데, 혜성이 동정(東井) 별자리에 나타나자 황제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하고 대사면하였더니 이날 저녁에 혜성이 소멸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세조가 “이를 기록한 자는 지나치다. 천도가 과연 이같이 반응이 빠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고, 다시 “어찌 반성한다고 해서 능히 재앙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세조실록』 1년 9월 16일).

조선시대에는 혜성의 천변을 중시하여 매우 많은 관측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많은 혜성 기록 중에서 1456년(세조 2) 5월의 것이 조선 최초로 방문한 핼리혜성으로 연구되어 있다. 말하자면 1453년(단종 1) 10월의 계유정난과 1455년 단종의 폐위에 따른 세조의 즉위라는 정치 변혁을 두고 하늘이 심한 견책을 내린 셈이며, 핼리혜성이 1456년 5월 27일에 마지막으로 관측된 뒤 불과 5일 뒤인 6월 2일에 이른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 천견의 징조가 더욱 정확한 것이 되었다. 동년 10월에는 단종이 사사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핼리혜성이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혁명을 모두 견책하고 지켜본 것이라 하겠다.

조선에 들어 두 번째로 출현한 핼리혜성은 1531년(중종 26) 윤6월 28일에 나타나 7월 28일까지 한 달간 관측된 것이며, 경상도에서는 윤6월 22일부터 관측되었다. 그럼에도 그 이전인 1471년(성종 2) 12월 2일에 혜성이 각수(角宿)의 천전성(天田星)에 나타나서 이듬해 1월 13일까지 40일간 관측되었으며, 1490년(성종 21) 11월 27일 다시 출현하여 한 달 남짓 동안 머물다 이듬해 1월 3일에 사라졌다고 기록하는 등등, 76년 주기의 핼리혜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매우 많은 혜성 관측이 수록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 7월 1일 삼태성 자리에 출현하여 9월 4일까지 관측된 것도 핼리혜성이며,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숙종 연간에 3년, 6년, 8년과 27년 등 무려 네 차례나 혜성이 장기간 출현하여 이를 갖고 여러 가지 재이론과 천견론을 펼쳤으며, 잇단 가뭄과 재해로 민심도 매우 흉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 1682년(숙종 8) 7월 22일에서 8월 18일까지의 것이 핼리혜성이다. 그 다음은 1759년(영조 35) 3월 6일에서 4월 29일까지, 다음은 1835년(헌종 1) 8월 22일에서 9월 29일까지이다. 1910년 5월 19일 찾아든 핼리혜성은 조선조 최후의 것이 된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즈윈, 2008.
  • 김일권, 『임원경제지 위선지 역주』, 소와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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