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화인(向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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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

개설

향화인(向化人)은 귀화인(歸化人)·투화인(投化人)과 같은 의미로,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을 말한다. 향화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 법제화되었다. 조선에 귀화한 사람을 일반적으로 향화인으로 불렀는데, 향화한 배경이 다양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에 대한 대우 규정들을 마련하지만, 향화인으로 규정되는 것은 향화인 자신과 그 친아들로 한정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향화인은 외국인으로서 귀화하여 그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 다른 나라에 내부(來附)하거나 내조(來朝)한 사람, 또는 투항하거나 포로로서 지방에 분치된 자들에 대해서도 향화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향화와 함께 쓰인 용어는 귀화·귀복(歸服)·귀부(歸附)·귀조(歸朝)·내귀(來歸)·내복(來服)·내부·내투(來投)·투화(投化)·내항(來降) 등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점차 귀화·귀조·내투·투화 등이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고, 일본에서는 귀화와 투화가, 한국에서는 내투가 많이 쓰였다.

고려시대에는 투화와 내투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투화·향화·내항·내투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그 중에서 향화와 투화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향화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도 대개 ‘향화’로 표기되었다. 또한 『경국대전』에 의하면 향화는 왜인이나 야인이 나라를 향해 투화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투화·향화·내항·내투 등 다양한 용어들이 향화라는 용어로 법제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귀화한 사람들을 보통 향화인으로 불렀다.

한편 투화가 단순히 내부(來附)의 의미가 있는 데 비하여 향화는 완전한 귀화를 의미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향화나 투화라는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향화와 투화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華夷) 사상과 덕치주의에 입각한 덕화와 교화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귀화는 단순한 이민족의 유입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복속을 동반하는 의미를 담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이민족의 내국인화를 의미하였으며, 향화인이나 귀화인, 투화인은 그러한 행위를 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확립되어 갔다.

조선시대 일본인과 여진인 가운데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서 조선에 투항 또는 내투한 자 모두를 향화인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사송인(使送人)으로 조선에 와서 거주하기를 희망한 자, 식량이나 토지의 부족 등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내투한 자, 피로인(被虜人: 잡혀간 조선 백성)을 송환하면서 따라 온 자, 정벌과 전쟁 등으로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자,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자, 추장 또는 상관의 허락을 받고 이주를 허락 받거나 인질로서 온 자 등 다양하였다.

향화인은 식량·의복·토지·가옥·노비를 하사 받았고, 본관(本貫)과 사성(賜姓)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향화인들의 안정을 위해 전세(田稅)는 3년간, 요역(徭役)은 10년간 면제해 주었고(『세종실록』 5년 3월 25일), 손자대까지 군역을 면제하였으며, 증손자부터 군역이 부과되었다(『성종실록』 18년 9월 7일). 또한 조선 여인과의 결혼[娶妻]을 허락 받기도 하였는데, 그 대상은 의녀(醫女), 공처(公處)의 비(婢) 등이었다가 세종대에 공사비(公私婢)로서 양부(良夫)에게 시집가서 낳은 여자로 항식을 삼았다(『세종실록』 20년 1월 28일).

향화인들은 지방 군현에 나누어 거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향화인들 중 특수한 기술과 무력적 재능이 있는 자들은 관직을 제수 받아 서울에 거주하였고, 녹봉·월료(月料)·마료(馬料)·과전(科田)을 지급 받았다. 향화한 지 1~2년 동안에는 의복과 월료를 주고, 여러 해가 지난 자는 1인당 쌀·콩 10석을 주었으며, 4품을 제수 받은 자는 5년을 기한으로 월료의 반을 주었다(『단종실록』 1년 5월 27일). 그리고 향화인이 조선의 관직을 받으면 노비를 하사 받는 것이 법제화되어 있었지만, 노비의 하사는 관직을 받은 본인에게만 해당되었고 그 자손에게는 물려줄 수 없었다(『중종실록』 19년 12월 14일). 한편 관직을 받은 향화인들은 통역이나 향도(嚮導), 원거주민들에 대한 초무(招撫), 정벌에 대한 종군(從軍) 등에 종사하기도 하고, 시위(侍衛)로서 왕과 왕궁을 호위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향화인의 자제는 과거 응시를 허락 받기도 하였는데, 본인이 향화한 자와 그 친아들만 향화인으로서 응시 자격을 주었고, 친손자 이하는 향화인이 아닌 본국인의 예에 따라 과거에 나가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1년 5월 29일). 따라서 향화인으로 대우를 받는 범위는 향화한 자와 그의 친아들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향화인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향화한 후 조선에서 낳은 자는 자지향화(子支向化)라 하여 조선의 백성과 같이 취급하였으며, 향화하기 전에 여진이나 일본 등의 본토에서 낳은 자는 기신향화(己身向化)라 하여 향화인으로 대우하였다(『중종실록』 19년 12월 15일).

향화인이나 그 자손이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조선의 법률에 따라 처벌하였지만 일종의 무휼책을 실시하여 감형을 시켜 주는 일이 많았다. 모반 등 중대 사건에 연루되거나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향화인이고 조선의 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형을 시켜 주거나 용서해 주는 사례가 많았으며, 향화인에 대해 죄를 감해 주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8년 11월 20일).

한편 명·청 교체기 이후 명나라 유민(流民)이 조선에 귀화하자, 조선에서는 이들을 여진이나 일본의 향화인과는 구분하여 황조인(皇朝人)이라 불렀다. 황조인은 일반 향화인보다도 더 우대받은 반면 향화인에 대한 우대는 점차 사라지고 단속과 보존의 대상이 되어 갔으며 일반 백성과 같은 의무가 부여되었다.

참고문헌

  • 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국학자료원, 1996.
  • 전해종, 『한중 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0.
  • 한문종, 『조선 전기 향화·수직 왜인 연구』, 새미, 2005.
  • 한성주, 『조선 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박이순, 「당·일본·고려에 있어서의 ‘번(蕃)’·‘귀화’에 대한 인식 고찰」, 『동아시아고대학』25, 2011.
  • 서근식, 「조선시대 ‘향화’ 개념에 대한 연구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37, 2009.
  • 전해종, 「「귀화」에 대한 소고 : 동양 고대사에 있어서의 그 의의」, 『백산학보』13,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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