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선잠의(享先蠶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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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3월에 길한 사일(巳日)을 택하여 선잠단(先蠶壇)에서,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하던 의례.

개설

국가의 제사 대상 중 살아서 행한 공덕(功德)을 인정받아 사후에 신으로 모셔진 대상을 인귀(人鬼)라 하고, 인귀에 대한 제사를 ‘향(享)’이라고 한다. 따라서 향선잠의는 인귀인 선잠(先蠶) 즉 서릉씨에게 제사하는 의례를 가리킨다. 서릉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 즉 헌원씨(軒轅氏)의 비(妃)로, 처음으로 누에치기를 가르쳐 주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국가의 제사는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뉘는데, 향선잠의는 중사에 속하였다. 폐백(幣帛)으로는 자의 일종인 조례기척(造禮器尺)을 기준으로 1장 8척 길이의 검은색 저포(苧布)를, 희생(犧牲)으로는 양과 돼지를 1마리씩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누에치기는 일찍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기원전 41년에 6부(部)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잠단을 설치하고 향사를 거행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음력 3월에 길한 사일을 택해 제사를 지냈으며, 폐백으로는 18척의 검은색 비단을, 희생으로는 돼지 1마리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0년(정종 2)에 처음으로 선잠에 제사하였다(『정종실록』 2년 3월 4일). 1401년(태종 1)에는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라, 선잠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할 악장을 짓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년 12월 21일). 그 뒤 1413년(태종 13)에는 이전까지는 돼지만 희생으로 사용하였으나 양(羊)을 추가하도록 하고(『태종실록』 13년 1월 21일), 제사의 규모를 중사로 정하였다(『태종실록』 13년 4월 13일). 이듬해인 1414년(태종 14)에 예조에서 선잠단의 설치 규정을 아뢰자(『태종실록』 14년 6월 13일), 그에 따라 동소문(東小門) 밖 사한이(沙閑伊)에 선잠단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이후 선잠단의 위치는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1473년(성종 4)에 예조에서 선잠단을 동교(東郊)에 위치한 선농단(先農壇) 곁으로 옮길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성종실록』 4년 10월 25일). 그런데 이듬해인 1474년(성종 5)에 다시 예조에서, 선잠단이 도성 북쪽에 있어 수나라의 제도와 일치하므로 예전대로 수축할 것을 건의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성종실록』 5년 3월 28일). 1476년(성종 7)에 예조에서, 선잠단은 북교(北郊)에 있고 채상단(採桑壇)은 후원에 있으니 송나라 제도에 따라 관원을 보내 선잠에게 제사하게 할 것을 청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성종실록』 7년 9월 25일)으로 미루어, 이후에는 선잠단이 북교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77년(성종 8)에는 조선시대 최초로 왕비가 의례에 참석하는 친잠의(親蠶儀)를 거행하였다(『성종실록』 8년 3월 14일).

선잠에 대한 제사는 이후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으나, 1908년(융희 2)에 발효된 ‘칙령 제50호 향사이정건(享祀釐正件)’에 따라 선잠단의 신주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지고 향사 의례는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의식은 의례를 거행하기 전의 준비 과정과 당일의 의례 절차로 구분된다. 준비 과정은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등을 말한다. 당일의 의례는 사배례(四拜禮), 전폐(奠幣), 삼헌(三獻), 음복수조(飮福受胙), 철변두(徹籩豆), 망예(望瘞)의 순서로 진행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향선잠의).

재계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일을 말하는데, 예조의 요청에 따라 총 5일간 행한다. 3일 동안은 산재(散齋)라 하여 평소처럼 일하면서 음식과 행동을 삼가고, 2일 동안은 치재(致齋)라 하여 오직 제사와 관련된 일만 행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향선잠의 재계). 진설은 제사 2일 전에 제단을 청소하고 제사에 사용할 집기 및 그것을 보관할 장막을 설치하는 일과, 제사 하루 전에 제사에 참석할 사람들의 자리와 의례를 행할 자리를 정하고 신위를 놓아두는 신좌(神座)를 설치하는 일 등을 말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향선잠의 진설). 성생기는 희생으로 사용할 양과 돼지 및 음식을 담는 찬구(饌具)가 합당한지 살펴보고, 희생을 잡는 일을 가리킨다.

제사 준비가 끝나면 당일 축시(丑時) 5각(刻) 전에 신위판을 설치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과 헌관(獻官)은 축시 전에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헌관이 자리에서 4번 절하면 참석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4번 절하며 신을 맞이하는데, 이를 사배례라 한다.

전폐는 헌관이 향을 3번 올린 뒤 미리 준비한 폐백을 신위 앞에 놓는 일을 말한다. 폐백으로는 조례기척을 기준으로 1장 8척 길이의 검은색 저포를 올린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폐백). 삼헌은 신에게 술잔을 3차례 올리는 일을 가리킨다. 첫 번째 잔을 올리는 것을 초헌, 두 번째를 아헌, 세 번째를 종헌이라 하고, 잔을 올리는 담당관은 차례로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이라고 한다.

제사에 올린 술은 복주(福酒), 고기는 조육(胙肉)이라고 하는데, 헌관이 조육을 받고 복주를 받아서 마시는 절차를 음복수조라 부른다. 여기까지가 신을 모시고 경건하게 예를 행한 뒤 복을 받는 절차이다. 음복수조가 끝나면 모신 신을 다시 돌려보낸다는 의미에서 철변두를 행한다. 철변두는 제기인 ‘변(籩)’과 ‘두(豆)’를 거둔다는 뜻이지만, 실제 의례에서는 변과 두를 조금씩 움직여 놓는다. 그런 다음 헌관이 4번 절하여 송신(送神)의 절차를 마치면, 제사에 사용한 축판과 폐백을 미리 준비한 구덩이에 묻는데 이를 망예라고 한다. 구덩이의 흙을 반쯤 덮으면 헌관이 먼저 퇴장하고, 이후 다른 참석자들도 4번 절하고 나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이욱, 「근대국가의 모색과 국가의례의 변화-1894~1908년 국가제사의 변화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9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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