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보(豊山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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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회령부 풍산에 설치한 보.

개설

풍산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소속 참(站) 4곳 중의 하나였다. 1446년(세종 28)에 찰방을 혁파하고 역승(驛丞) 4인을 임명했다. 또한 풍산은 외적 방비에 매우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풍산보는 함경도의 작은 보루였다. 1462년(세조 8)에는 원래 권관을 파견하던 것을 바꾸어 만호를 파견하였다. 1674년(현종 15) 풍산에 진보(鎭堡)를 설치했다.

위치 및 용도

풍산은 회령의 남쪽에 있다. 무산령(茂山嶺)을 경계로 북쪽에는 풍산이 남쪽에는 무산이 있다. 1445년 찰방을 혁파하고 풍산도(豐山道)의 참로(站路)가 번성해질 때까지 한 길처[道]마다 역승(驛丞) 한 사람을 두되, 조사(朝士) 중에 부지런하고 착실하며 일처리 잘할 사람으로 골라서, 7품 이하의 품관인 참상(參上)이나 6품 이상 종3품 이하의 품관인 참외(參外)에 구애됨이 없이 임명해 보내도록 했다. 이에 1446년 회령의 석보역(石堡驛)에서 오진(五鎭)과 부거(富居)까지를 풍산도로 삼아 역승 4인을 임명했다. 풍산보는 종성부(鍾城府) 방원보(防垣堡)·부령부(富寧府) 황절보(黃節堡)와 함께 적을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점에 있었다. 하지만 본진(本鎭)인 회령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적변이 있어도 미처 구원할 수 없다 하여 1462년(세조 8)에 종래의 종9품의 무관직인 권관 대신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를 임명해 파견했다. 권관이 군사들과 등급이 같아서 교령(敎令)을 행하지 못해 방어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1492년(성종 23) 풍산만호는 의흥위(義興衛)·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 등의 부사용(副司勇)에서 임명하도록 했다. 1674년 풍산에 진보를 설치했고, 1679년(숙종 5)에 성(城)을 쌓았다.

변천 및 현황

1460년(세조 6)에 보을하보(甫乙下堡)를 혁파하고 풍산내지(豐山內地)로 축소 배설했다. 풍산보는 회령의 군사가 여름과 겨울을 막론하고 방수했다. 성종대 이후 풍산보가 고립되고 약해졌다. 연산군대 무산보(茂山堡)에서 풍산보에 이르는 40리(약 16㎞)와 풍산보에서 회령진(會寧鎭)에 이르는 60리(약 24㎞) 사이에는 방비 시설이 전혀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두 보루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농사짓는 땅과 다니는 길이 모두 외떨어진 곳에 있고 적들의 침입로와도 가까웠을뿐더러 지세도 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천(檢天) 이하의 강가에 가까이 살고 있는 야인들이 연속해서 드나들면서 사람과 마소를 약탈해 갔다. 이 때문에 당시 풍산보를 삼기 근처로 옮기자는 의견이 1503년(연산군 9)에 있었다. 이후 중종대에 이르면 풍산과 무산의 두 보 사이를 야인들이 사냥과 방목을 한다면서 마음대로 왕래했다. 1509년(중종 4) 당시 풍산보의 토지는 무산만큼 척박하지는 않았으나 민호(民戶)는 원정(元定) 50호에서 17호가 감해진 상태였다. 이에 무산보를 양영만동(梁永萬洞)과 동량동(東良洞)의 중앙에 옮기고, 풍산보를 삼기 근처로 옮겼으며, 또 보을하의 옛 보루를 다시 설치했다. 1524년(중종 19) 회령 전답이 매몰되어버리자, 1525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풍산보로 옮겨왔다. 풍산은 1542년(중종 37) 보 안의 민가가 열 집이 못 되고 토병(土兵)이 겨우 30명인데 쓸 만한 자는 7~8명 수준이었다.

1877년(고종 14) 풍산보는 폐무산(廢茂山)에 있는 남북병영에서 교대로 추천하는 자리로 삼았다. 고풍산보(古豐山堡)의 성가퀴와 관사를 수리하는 대책은 해당 만호를 개차하고 종3품의 무관직인 첨사 자리에 승급시켜서 도(道) 안에서 합당한 사람을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였다(『고종실록』 14년 7월 25일).

형태

1489년(성종 20)에 완성한 성의 높이가 12척(약 3.7m)이고 둘레가 4,089척(약 1㎞)이었다(『성종실록』 20년 3월 30일).

관련사건 및 일화

1466년(세조 12)에 중국인 요광(要光) 등 4명이 올량합(兀良哈)의 이을대(伊乙大)의 포로가 되었다가 1484년(성종 15) 2월 초9일 밤에 몰래 이을대의 처자를 죽이고 풍산보로 도망 온 일이 있었다(『성종실록』 15년 3월 25일).

1600년(선조 33) 지중추부사이일은 자신이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있을 적에 관할지역인 풍산보에 누차 노략질하는 일이 있었는데 보의 접경에 사는 야인 중에 풍산보 내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원하는 자가 있어 소원대로 시장을 열어주었더니, 그 뒤로 노략질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보고했다(『선조실록』 33년 1월 2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